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커뮤니티 포럼] 진실하지 못한 대통령들의 말이 만든 비극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③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월맹)의 최고 작전회의가 이루어진 회의실 전경. 1960년대 초 이곳에서 남베트남 내 민족해방전선을 총력 지원하는 전략이 수립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월맹)의 최고 작전회의가 이루어진 회의실 전경. 1960년대 초 이곳에서 남베트남 내 민족해방전선을 총력 지원하는 전략이 수립됐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언어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더 정확히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세 명의 대통령의 말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잉태됐고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언어 속에 내포된 파괴성을 제어하지 못한 미국 사회는 빠져나올 수 없는 베트남의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백악관 독주·무력했던 의회

미국의 정치역사를 보면 지도자의 국가 운영 철학이 말이 되어 미국 사회에 전달되고, 이 말은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책으로 현실화, 구체화된다. 이런 생각, 언어, 정책의 진행 과정에는 필터링과 브레이크가 필수다. 정책의 비현실성, 유해성, 편향성, 그리고 폭주를 점검하고 제어하는 장치가 의회정치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확전 과정에서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독주열차 백악관(행정부)을 철길 옆으로 비켜 서서 무력하게 바라보는 미 의회(입법부)의 모습을 본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민에 패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떠났다. 호찌민은 반 쪽짜리 독립을 성취했다. 프랑스가 떠난 베트남은 북의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과 남의 베트남 공화국 (월남)으로 갈라졌다. 영구적 분단이 아닌 임시 상태로 2년 후 베트남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를 한다는 이해가 있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했다. 미국은 베트남을 합법적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군사원조에 들어갔다. 남베트남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동맹도 형성했다. 미국을 포함해서 베트남 및 동남아시아와 이해가 있는 8개국이 연합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이다. 미국이 월남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호찌민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프랑스가 벗어 놓고 떠난 피가 물든 군화를 신고 선 것과 같았다. 강자는 자기의 이익 추구가 아니면 약자 편에 설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 다시 현실로 다가왔다. 이후 20년 지속되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최고 지도부가 사용한 기기와 낙후된 물품들. 전쟁은 물질적 우세로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진 이길주 교수]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최고 지도부가 사용한 기기와 낙후된 물품들. 전쟁은 물질적 우세로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진 이길주 교수]



개입 부추긴 '도미노 논리'

미국을 포함해 관련국 모두가 아파했던 이 비극적인 전쟁의 개입을 부추긴 언어, 생각과 논리 및 정책의 토대를 일반적으로 '도미노 논리(Domino Theory)'라 부른다.

1954년 4월, 디엔 비엔 푸 전투가 한창일 때 아이젠하워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먼저, 프랑스가 통치하는 베트남의 경제적 가치를 언급했다. 베트남이 생산하는 물질적 자원을 국제 사회가 필요로 함을 역설한 그는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자유세계에 적대적인(inimical to the free world) 독재체제로 규정했다. 북베트남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적은 남베트남을 공산화 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줄지어 세워놓은 수많은 도미노를 뒤로 넘어지게 하는 첫 도미노가 남베트남이라 했다. 베트남에서 밀리면 세계 공동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붕괴 과정이 시작(a beginning of a disintegration that would have the most profound influences)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 도미노 현상이 남베트남 국민을 공산화 한 뒤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위협하고, 종국에는 미국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세력이 될 것이라 했다. 이렇게 호찌민은 세계적인 악의 세력의 우두머리로 부상했다. 국수적 지역적 불편요소(irritant)를 과대 포장해 총체적 위협으로 확장한 언어였다. 이 말은 곧 '국가적 신념(national faith)'으로 확대된다.



젊은 케네디의 진군 나팔

미국인들이 뽑은 사상 최연소 대통령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역사적 존재 이유에 대한 도전으로 격상시켰다. 1961년 1월, 대통령 취임 연설에 담긴 그의 언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을 미국의 독립 전쟁에 버금가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명으로 규정한다.

그는 먼저 역사의 지속성을 말했다. 그는 방금 자신이 전능하신 신과 미국인들 앞에서 175년 이어온, 미국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음을 상기시켰다. 세상은 변했지만 미국의 가치는 지속한다는 말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쟁취한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의 손길에서 비롯된다는 신조"였다. 공산주의는 이 성스러운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고, 호찌민도 이 위협의 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케네디는 젊고 새로운 지도력의 부상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세기에 태어나서 전쟁으로 단련되고, 힘들고 쓰라린 평화로 가르침을 받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긴 유산을 자랑스러워 하는 미국을 이끌어 갈 진취적인 지도력이었다.

이런 케네디가 미국과 자유세계를 지탱하는 "인권이 서서히 유린당하는 것을 좌시하거나 허용하지 않을"것이라 했다. 어떻게 이 사명을 실천한다는 것인가? "자유를 확실히 존속시키고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달게 받고, 어떤 짐도 짊어지고, 어떤 어려움과도 맞서며, 어떤 친구라도 돕고, 어떤 적들과도 싸울 것"이라 했다.

케네디의 말은 그의 표현대로 미국의 "친구와 적 모두"에게 알리는, 세계를 향한 진군의 나팔 소리였다. 그는 곧 남베트남에 500명 규모의 군사 자문단을 보냈다. 다음해인 1962년 베트남군을 훈련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는 1만1000명으로 늘었다. 1963년에는 1만6000명이 케네디의 표현대로, 베트남이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고 있었다. 현실을 호도하는 진실하지 못한 언어는 베트남 비극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통킹만 사건 후 정면 대결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부통령 린든 존슨이 새로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4년 8월 2일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발생한다. 베트남 북동쪽 통킹만 해상에서 정부 수집 업무를 수행하던 미 해군 구축함 USS 매덕스(Maddox)함을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이 공격한 것이다. 미국과 베트남 민주공화국 사이의 첫 정면 대결이 이루어졌다. 이틀 후인 4일, 북베트남이 또 다시 매독스함을 공격했다는 아직도 확인 되지 않고 있는 주장이 제기됐고 존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폭을 지시했다. 동시에 미 의회는 전쟁선포도 없는 전쟁을 존슨이 자신의 판단에 의해 수행 할 수 있도록 하는 백지수표를 발행했다.

미국의 폭탄이 베트남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베트남이 자유를 수호할 수 있도록 측면 지원할 따름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필요 없게 됐다. 다음 해 미국의 지상군이 다낭에 상륙하고 베트남은 미국의 전쟁이 된다. 존슨도 아이젠하워와 케네디처럼 전쟁의 당위성을 말해야 했다. 그는 이 전쟁을 베트남에 '위대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평화를 위한 파괴로 포장한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