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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한국 국경선은 안녕한가?

[애틀랜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1/06 16:12

동북아시아에 격랑이 일고 있다. 미중간 패권경쟁 와중에 중러의 협력과 대응이 강화되고 있다. 이 참에 위상을 강화하려는 일본의 태도 변화, 한미일 안보협력의 한 축인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를 선택한 한국 정부, 핵 보유를 굳히려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맞물리며 동북아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주변 정세의 안정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희망하는 한국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위기를 맞고 있지만 특히 우려되는 것은 주변 정세의 변화다. 구한말과 2019년 한반도 국제정세를 비교할 때 공통점 중의 하나가 바로 한반도가 아직도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며, 동북아 끝자락에 위치한 한반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나라 칸의 일본 정벌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진출 야망을 위해 일으킨 임진왜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한반도를 발판삼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지금의 한반도 정치 지형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로써 100년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곳이다. 냉전시대의 한반도는 정치 이념의 대결장으로서 공산주의 남하를 막는 ‘마지노선’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는 오늘날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팽창을 막는 방어선인 동시에 ‘한미일 삼각동맹’과 ‘북중러 삼각동맹’이 대치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구한말 고종과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던 정치권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마디로 무능했다. 당파 싸움으로 조정은 멍들었고, 개화에 실패했으며, 체계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경제는 피폐했고, 백성들은 신음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시계를 2019년으로 돌려보면 지금의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 우리 경제는 ‘소득주도성장’ 등의 잘못된 정책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와 관련해 사전 인지도 없었고, 뚜렷한 해결 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 정권의 무능으로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입지가 좁아지고 있고 ‘패싱’ 당하고 있다.

한반도 정세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책이 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셴(黃遵憲)이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건넨 <조선책략>이다. 구한말 일개 청나라 외교관(일본주재 공사관 참찬관)의 개인적 견해가 국내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주변 강대국의 역학구도에 다소 변화가 생겼지만, 한반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강의 각축장이다. <조선책략>의 핵심은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다. 중국과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일본과 결속을 강화하고, 미국과 연대해 러시아 남하를 막고 자강(自强)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조선을 위한 조언 같지만, 저변에는 중국의 세계관과 현실적 이해가 깔려 있다. 당시 중국은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이권침탈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흑룡강 동쪽까지 진출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도 사할린을 두고 러시아와 갈등을 빚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맞닿아 있는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워지면 중국은 더 이상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조선책략>은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는 유지한 채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새로운 적’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청나라 의도를 담고 있다. 사실상 ‘청나라를 위한 책략’인 셈이다. 비록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제국주의 속성 파악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지만, 당시 풍전등화의 처지인 조선 조정엔 ‘한 줄기 빛’으로 여겨졌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워 청나라 속셈을 읽을 능력조차 없었던 조선은 그 조언에 따라 1882년 서방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는 등 본격 다자외교의 길로 나아갔다.

<조선책략>은 중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씌어졌지만, 조선과 같은 약소국에 현실적인 타개책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동맹 강화와 열강의 세력균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앞선 문물과 제도를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라”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다. 하지만 조선은 자강을 소홀히 한 채 강대국에 줄서기만 하다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중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며 줄대기 외교만 하다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다. 오락가락하는 외교 탓에 제대로 된 동맹국도 만들지 못했다. “힘이 약하면서 명분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변고가 일어난 뒤에야 어찌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것은 무책(無策)”이라는 <조선책략>의 경고 그대로였다.

핵을 숨긴 김정은이 금강산에서 말했다. “저 너절한 건물들을 쓸어버리라”고. 현 정권의 애절한 구애를 그 한마디로 뭉갰다. 북한은 또 모친상을 당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조의문을 보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했다. 최근 블라디보스톡에서 발진한 러시아 조기경보기가 울릉도 상공을 비행했다. 곧 이어 전투기 3대가 한 바퀴 돌고 유유히 귀환했다. 중국 전투기가 대한해협을 정찰하고 일본 초계기와 광개토왕함간에 근접비행과 레이더 조준시비가 불거진 것이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이제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은 21세기 신제국들이 상대의 진의를 염탐하는 놀이터가 됐다. 대체 한국 국경선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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