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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그림찾기] 그래도 꽃은 핀다

봄이 와도 설악산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고 나뭇가지는 앙상합니다. 새파란 하늘, 삐죽삐죽 검은 바위, 잔설 위에 제일 먼저 피어나는 건 진달래입니다. 겨울을 견뎌낸 사람의 눈엔 그 분홍색마저 고맙고 대견해 보일 터, 화가 김종학(83)은 “색깔을 내기 위해 직접 꽃잎을 따다가 화면에 갖다 대 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고 돌아봤습니다.

1979년 10월, 김종학은 가정으로부터, 화단으로부터 도망쳐 설악산에 파묻혔습니다. 마흔둘, 화가로도 이름을 얻지 못했고 가장으로도 실패했습니다. 41년 전 설악산 가는 길은 지금과 달리 좁고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했을 텐데, 그렇게 들어간 설악산에서 김종학은 석 달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려 폭포에도 올랐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이혼에 충격받은 사춘기 딸에게 후에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좋은 그림 백 장도 못 남기면 너희들이 커서 우리 아빤 화가였는데 그림도 몇 장 못 그린 시시한 인간이었구나 비난받으면…백 장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억지로라도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날 나비·꽃 그림들이 나오게 됐단다.”(‘김종학의 편지’, 마로니에북스)

그림 백 장을 못 그린 덕에 살 수 있었던 그는 봄이 오자 주위에서 볼 수 있던 자연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할미꽃, 달밤에 고고한 박꽃, 이른 아침 나팔꽃, 쏟아지는 폭포 옆 녹음, 눈 쌓인 설악산의 소나무…. 세상에서 추방당한 화가에게도 자연은 한결같았고, 김종학은 거기서 소생할 힘을 얻었습니다.

극장엔 신작이 사라졌고, 공연장과 경기장엔 이제 관객도 함성도 없습니다. 한산해진 지하철과 식당도 반갑지 않습니다. 퇴근 후 친구나 동료와 맥주 한 잔 기울이던 일상도 아득합니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졸지에 추방당했지만, 그래도 봄은 옵니다. 많은 일들이 불확실해졌지만 비상한 상황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때, 잃었던 일상이 새롭게 빛나길 기다립니다.




권근영 /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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