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산전수전 공중전 콩깍지인생
눈이 안 보이면 분별이 안 된다. 인간은 보이는 것만큼 보고 사물을 판단한다. 나이 들어 제일 심장 상하는 것은 흰머리와 약화되는 눈이다. 흰머리는 좀 귀찮아도 염색하면 되지만 눈은 구제불능이다. 책 보고 칼럼 쓰고 매 순간 두드리는 자판기와 모니터, 이메일과 유투브까지 아예 아이폰을 손에 들고 산다.동점리 시골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다. 붉디붉은 해가 비슬산 중턱 넘어 짐실골로 빠지면 황토빛 앞마당에 어둑어둑 어스름이 깔린다. 삼만이 아재가 도끼로 찍어 만든 대나무 평상에 누워 옥이 언니가 꾸며 지은 귀신 할매 이야기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셋다. 옥이 언니는 홀어머니가 농사일로 논에 나가면 나를 업고 키웠다.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눈이 필요 없었다. 냄새로 손짓으로 키득키득 웃는 소리로 누가 곁에 있는 지 안다. 매일 같은 레파토리의 언니 이야기에 쫑긋 귀를 세우다가도 소슬바람에 귓볼을 스치면 별을 안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우리들의 눈은 아름다운 빛을 보기 위해서만 반짝였다. 눈은 찬란한 초목의 싱그러움과 물빛 하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망울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담았다.
삼만이 아재는 우리집 농사를 돕는 힘 세고 성실한 머슴이다. 착한 아재는 이웃 동네 총각들까지 맘 설레게 하는 바람둥이 끼 많은 옥이 언니를 사랑했다. 언니를 일편단심 사랑하는 아재 마음이 어린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언니 눈에는 나쁜 콩깍지가 끼였는지 아님 알고도 콩깍지를 뗐는 지 본체 만체 했다. 흙냄새 나는 촌놈은 죽어도 싫다던 언니는 파리가 미끄러지게 기름 바른 머리에 신식양복, 광 나는 구두 신은 도시 양반에게 시집갔다. 혼례식 마치고 신방 치른 뒤 신랑집으로 신행(新行)가는 언니 짐짝 매고 도살장 가는 황소처럼 슬퍼보이던 아재의 슬픈 눈빛이 생각난다. 산전수전 공중전 지상전 모두 겪은 언니의 한 많은 인생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콩깍지도 바로 덮혀야지 잘못 씌이면 신세 망친다.
시야는 시력이 미치는 범위다. 어떤 한 점을 주시했을 때 눈을 안 움직이고 볼 수 있는 범위다. 시선방향에 있는 중심은 뚜렷하게 보이고 주변에 있는 시야는 잘 안 보이거나 흐리다. 눈에 콩깍지 끼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시선이 멈추는 한 곳에 파란 불꽃이 타오르고 낯선 사람이 그대가 되고 처음이 익숙한 만남이 되고 동짓달에 봄꽃이 핀다. 기약할 수 없이 캄캄한 인생 길에서 콩깍지 아니라면 어찌 그대를 만났으리. 만남이 영원하지 않다 해도 슬퍼하지 말라. 사랑은 순간으로 충분하다.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콩깍지 사랑이라 해도 그대와 함께 한 겨울은 따스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말 할 수 없는 곳에 사랑의 빛은 존재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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