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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 기자의 보람끈

그녀는 엄마를 찾았다.

크리스마스에 그녀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편지의 머리글은 '2008년 OO사건 피해자 자녀입니다'였다.

사건 취재기자에게 'OO사건'이라는 단어는 자명종 소리와도 같다. 몽롱한 꿈속에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OO사건'은 울어댄다.

꼭 10년 전 한여름의 주말 밤이었다. LA한인타운 복층상가 1층 한 업소에서 불이 났다. 40대 한인 남녀 시신 2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한 달여 수사 끝에 방화로 결론지었다. 윤모(당시 49세)씨가 업소에 불을 질러 사귀던 동갑내기 여자친구 김모씨를 살해하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사건 취재는 속사정과 무관하게 냉정하다. 숨진 김씨에겐 딸과 아들이 있었다. 방금 엄마를 잃은 열아홉 살 딸을 붙잡고 '지금 심정이 어떠냐'라고 캐물었던 사람이 기자였다. 그 딸의 울음은 옹색한 기자의 밥벌이를 꽤 긴시간 되씹게 했다.

그 후 10년 만에 이메일을 보낸 그녀를 '그 딸'로 착각했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이는 캐나다에 사는 최모(35)씨라고 했다.

사연은 이렇다. 숨진 김씨는 첫 번째 결혼에서 최씨와 최씨의 여동생 두 딸을 낳았다. 김씨는 딸 최씨가 다섯 살 되던 무렵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딸 최씨는 아버지가 곧 재혼하면서 계모를 친모로 알고 살았단다. 그러다 2004년 캐나다 유학을 오면서 서류 속에서 친모 김씨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 후 엄마를 찾는 최씨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서류를 뒤졌고, 수소문했다. 끊어진 인연을 잇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 최씨 자매는 탐정을 고용했고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이미 2008년 사건으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최씨의 엄마 찾기는 슬픈 결말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최씨는 지푸라기 하나를 더 잡았다.

'어머니 사건 기사를 읽게됐어요. 저희에게 다른 형제들이 있다는 걸 알게됐습니다. 인터뷰를 하셨기에 연락처를 아실까 싶어 부탁드려요. 늦었지만 친지들도 찾아뵙고 싶어요. 꼭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최씨와 통화했다. 외가 식구들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예전 취재파일을 뒤졌다. 당시 사건과 관련된 인물 전화번호가 7개 나왔다.

5개는 불통이거나 다른 사람의 전화였다. 사용자 이름이 '언니'라고만 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다. 지푸라기의 끝이었다. 신호음 끝에 상대가 받았다. 숨진 김씨의 언니가 맞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전했다. 고마워할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언니는 조심스러워했다. "가족이 상의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쪽의 호의를 반드시 상대가 고마워해야 한다는 건 착각을 넘어 오만이다. 이모의 반응을 최씨에게 전했다. 최씨는 "이해한다"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5일 최씨는 다시 이메일을 보내왔다. '조금전에 큰 외삼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외할머니와 가족들이 소식을 듣고 좋아하셨다고 하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30년간 떨어진 가족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건 취재기자의 일은 보람과는 거리가 멀다. 칭찬받기보다 욕먹는 일이 더 많아서다. 보람의 원래 뜻은 '잊지 않기 위해서 두드러지게 해두는 표'다. 그래서 조상들은 책갈피를 끼워두는 끈을 '보람끈'이라고 이름붙였단다.

최씨 덕분에 정초부터 취재수첩에 소중한 보람끈을 하나 끼웠다. 그러니 정작 고마운 사람은 이쪽이다.

최씨가 찾은 보람끈의 끝이 궁금했다. 그녀는 10주기가 되는 8월 엄마 묘지로 인사하러 온다고 했다. 어떤 말부터 하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라고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엄마."

그녀는 엄마를 찾았다.


정구현 기획취재부장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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