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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가을 수채화

이경애 / 수필가

팰리세이즈파크웨이 도로변의 가을 숲 속은 노랑 바다였다. 그 속에 들어서면 내 몸에서도 노란 물이 줄-줄 흘러 내릴 것 같다. 매번 오는 계절인데도 자연의 변화는 나를 풀리지 않는 경이로움 앞에 서게 한다. 청명한 하늘아래 아기 요 같은 작은 구름 한 점이 떠 있다. 모든 만물들은 남은 가을 햇살에 해야 할 갈무리를 서두르는 듯, 날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고있다. 나뭇잎엔 가을색이 더 짙어지고 열매는 달게 익는다.

얼마 전 햇빛 좋은 휴일, 우린 친구부부와 뉴욕 주에 있는 미네와스카 주립공원내의 어느 산자락에 올랐다. 거기에 보석같이 반짝이는 호수가 있었다. 시루떡을 켜켜로 비스듬히 올려놓은 듯한 흰 암석의 절벽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난 높고 낮은 산책길을 따라 걷는 풍광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였다. 낮은 키에 가지가 공작새처럼 펼쳐 내려진 소나무 한 그루가 절벽 끝에 매달려 있다. 그 곁에 작은 정자와 어우러진 모습이 흡사, 내 고국산천의 정취와 닮아있다. 절벽 아래로 바위 사이에 빨간 단풍나무가 호수 물에 비취어 신비로운 비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린 등산로를 따라 숲길을 걸었다. 알 굵은 도토리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언제였던가, 고국의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웠던 서오릉 숲 속에서 도토리를 줍던 생각이 난다. 그 때 나보다 먼저 왔다 간 사람들이 많아 내 몫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쉬웠던 일이 떠올라 도토리 몇 개를 주워 보았다. 하나를 깨물어 쪼개보니 노란 속살이 통통하다. 길 위에 떨어진 도토리를 무심히 밟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까워하는 내 마음이 도토리와 함께 밟히고 있다.

가을 계곡을 흐르는 물빛은 예전 물빛이 아니다. 맑고 투명하며, 넘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단정히 흐른다. 스치는 실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몇 조각 낙엽들이 흐르는 물살을 붙잡고 뒤뚱이며 떠내려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끝은 어디일까? 묻지도 않고 무심히 흘러간다. 태어남도, 늙음도, 죽음도, 그저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고 있다. 더 오래 살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위에 서려고 다투는 헛된 욕심으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오만한 허욕들이 순결한 자연 앞에 부끄러워진다.

정상에서 바라본 산 아래 펼쳐진 넓은 숲은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 이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가슴속에 흥분을 감출수가 없다. 겨우 한 작품을 끝낸 수채화 초보자지만, 난 이 광경을 그림으로 옮기고 싶은 야무진 욕심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저 붉으나 아주 붉지 않은 물감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노르스름 황토빛 오묘한 색깔들을 만들 자신은 없지만 이 불타는 가을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드넓은 호박 밭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호박들이 흩어져 있었다. 가을은 어디에나 넉넉함을 남기고 있다. 주황빛 탐스런 호박들마다 허옇게 마른 줄기를 달고 있다. 마른 삭정이가 된 그 줄기는 마치 열 달 동안 태중에 아기를 키운 어머니의 탯줄 같다.

가을은 아름다운 결실을 남기고 떠나기를 주저하지 앉는다. 가을은 풍성한 결실 곁에 두고 떠나야 하는 상실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열매가 기실, 타인의 몫이 아니던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생각없이 사는 나의 삶을 반추해 본다. 저 호박 줄기처럼 나는 타인을 위해 어떤 열매를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아름다운 가을 풍경으로 들뜬 마음이 주춤 내려앉는다. 빛깔 좋은 호박 하나 따서 옮겨놓고 싶었으나 원두막에 주인이 보이지 않아 사진만 가지고 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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