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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함정 수사

“미국에 이민 와서 이런 자리에 오다니 기분이 참담했다.
그렇지만 나는 무죄를 받고 싶었다”

미국에 이민 와 리커스토어를 꽤 오래 운영했다. 가게에서 위스키 와인 등 리커를 판매하려면 허가증이 있어야 한다. 리커스토어는 대체로 영업시간이 길다. 1년 365일 문을 닫지 않고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여는 가게도 많다.

우리는 이민 온 처음부터 일에 얽매이지 말자, 벌이가 적으면 그에 맞춰 살아가자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라 부부가 번갈아 애들을 챙겨야 했기에 종업원을 채용하여 가게 운영을 했다.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나는 애들 때문에 속이 터지고, 이따끔 종업원도 속보이는 짓을 했지만 ‘그래 함께 먹고 살자’고 생각하며 맘 편하게 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06년 치노시에서 조그만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새해를 맞아 가게 청소를 하기로 맘 먹었다. 모처럼 가게에 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사무실 현금박스 등을 구석구석 닦고 있을 때였다. 마침 종업원은 창고에 들어가 있고 남편은 외출을 해서 자리에 없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한 백인이 어린 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하이’ 하고 손님을 바라보는데 어른은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서있고, 열대여섯 살쯤 된 애가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왔다. 별 생각 없이 돈을 받고 봉투도 없이 주었다. 그 순간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던 백인이 갑자기 형사라고 말하며 애한테 알코올을 팔았다고 다그친다. 너무 당황했다. 그게 알코올이냐? 나는 음료수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술이면 봉투에 넣어주지만 음료수인 줄 알고 그냥 주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알코올은 규정상 꼭 봉투에 넣어 주어야만 했다. 형사는 내 말엔 대꾸도 않고 티켓을 끊어주며 법정으로 나오라고 했다. 앞이 깜깜했다. 뭐라 변명할 사이도 없이 소년의 사진과 내 사진을 찍고 가버렸다. 함정 수사였다.



미국은 법적으로 21살 넘은 사람에게만 알코올을 팔 수 있다. 30여년 리커를 하며 철저하게 지켜 왔는데 꼭 에너지 드링크처럼 생긴 게 나와서 가게 일을 잘 안 하던 내가 음료수인 줄 알고 실수를 한 것이었다. 박카스 보다 약간 큰 알루미늄 통에 술을 넣은 알코올 도수 5도짜리 상품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진열장에 음료수 파는 칸과 알코올 파는 칸이 구분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그것도 몰랐냐고 핀잔을 준다.

알코올을 관할하는 기관인 ABC에서 연락이 왔다. 벌금만 내면 끝나는 일이지만 억울했다. ABC사무실에 찾아 갔다. 담당자에게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겠다고 했다, 판결에 따라 벌금을 내야한다고 결정이 난다면 그때 내겠다고 했다.

법정에서 싸워 보기로 했다. 우선 분간이 잘 안 되는 에너지 드링크와 알코올 드링크 사진을 찍었다. 딸에게 부탁해 사유서를 써 달라고 했다. 치노시 법정에 나오라는 날에 맞추어 나갔다. 판사 검사 변호사가 다 공무원이었다. 국선 변호사라 변호사 비용을 낼 필요도 없었다. 엄숙한 분위기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다. 판사가 들어올 때 기립하고 판사가 앉아야 재판 받을 사람이 앉는다. 죄수복에 수갑 찬 사람도 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이런 자리에 오다니 기분이 참담했다. 그렇지만 나는 무죄를 받고 싶었다.

변호사가 여자였다. 처음 만날 때부터 아주 친절했다. 마음이 놓였다. 나는 사진과 함께 딸이 써준 종이를 주었다. 내가 판 물건이 알코올과 분간하기 어려운 상품인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판사가 유죄냐 무죄냐를 물었다. 무죄라고 대답했다. 다음 재판 날짜를 받았다. 변호사가 통역이 필요하냐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두 번째 재판 때 한국인 법정 통역관이 왔다. 내가 봇물 쏟듯 설명했다. 어린애한테 미쳤다고 알코올 성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팔았겠냐. 정말 몰랐다. 에너지 드링크 흉내를 낸 회사 측 잘못이라며 열을 냈다. 그러나 그날도 또 세 번째 출두 날짜를 알리고 무죄를 주지 않았다. 갈 때마다 시간 소모가 많았다. 장사하는 사람은 시간이 돈인데 이래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그냥 벌금을 물고 마는구나, 그러다 몇 번 걸리면 리커 라이선스를 뺏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하고 변호사하고 타협이 안 되고 있었다. 세 번째 법정에 갔을 때 변호사가 배심원 청구를 할까 묻기에 그러자고 했다. 나는 배심원들에게 실제 상품을 들고 와 작은 글씨로 알코올 몇 프로 읽어가며 평소에 가게 일을 잘 안 했던 사람이 쉽게 분간할 수 있겠느냐 호소할 참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반 년도 더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끝까지 정말 모르고 팔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아서였을까. 결국 무죄를 받았다. 자기네들도 배심원까지 부르려면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결국 내가 이겨냈다. 너무 기뻤다. 하도 기뻐서 이 사연을 매스컴에 알리고 싶었다. 함정 수사에 걸리면 그냥 벌금을 덜렁 내지 말고 법정에서 당당히 싸워야 한다고,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한인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지금도 함정수사를 하러 형사들이 리커 스토어에 가끔 나타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사들은 나이가 어리면서도 노숙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데리고 다니면서 술을 사게 한다. 운전 면허증을 검사하지 않고 술을 팔면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낯선 손님한테는 무조건 운전 면허증을 보자고 해야 한다. 내 경우는 눈으로 봐도 16살 정도 되는 애였다. 그걸 느끼며 술이 아닌 드링크라고 판단하며 판 것이었다. 지금은 알루미늄 통에 넣어 드링크 흉내 낸 술은 없다고 한다. 잠깐 반짝하던 상품이었던 것 같다.

영어도 더듬더듬 잘하지 못하는 주제에 미국 법원에 가서 잘잘못을 따져서 무죄를 받아낸 일이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이 땅에서 소수민족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부당한 일도 꾹 참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내 권리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리커를 처분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출가하고 부부가 연금을 받아가며 형편에 맞춰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고 있다. 리커 마켓을 운영하는 동포들에게 내 작은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권 조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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