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한국액션 영화대부 정창화 감독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샌디에에고 연말특집 거장 정창화
도전 속에 올곧게 살아온 인생과 영화
정창화 감독의 인생스토리

91세에 낚시보트를 구입한 정창화 감독(사진)이 자택에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쏟아 놓으며 후배들에게 “용기를 갖고 늘 도전하는 삶이 아름답지 않겠냐”고 격려하고 있다.

91세에 낚시보트를 구입한 정창화 감독(사진)이 자택에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쏟아 놓으며 후배들에게 “용기를 갖고 늘 도전하는 삶이 아름답지 않겠냐”고 격려하고 있다.

지난해 8월 29일 충주시에서는 ‘2019충북 국제무예액션영화제’ 전야제가 열렸다. 원래 이자리에는 정창화 감독이 ‘명예운영위원장’으로 초청됐었던 행사다. 충청북도에서 주최한 이 행사는 정 감독을 초빙해, 한국 액션영화에 바친 그의 60년 인생을 회고하는 <액션 매스터 정창화 감독 특별(회고)전> 도 마련하고자 했었다. 소위 정창화 키즈라 불리는 한국 액션영화 관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제1회 충북 국제무예액션영화제”의 이미지 제고 및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제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색이 달라 좌파니 우파니 하는 사회적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 영화제에 나가면 자칫 충돌이 생기고 불편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시종 충북 도지사가 몇 년전부터 이 행사를 추진하면서 협조해 달라고 해와 자비를 들여 두 차례나 한국을 다녀왔었지만 영화인으로서 ‘바르지 못함’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영화인이며 예술인으로 평생을 도전 속에서 올곧게 살아온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편집자 주>


영화 잊고 1996년 샌디에이고로 이민
2003년 부산영화제 계기로 다시 만난 영화



23년전인 1996년 정창화 감독은 고교 동창인 친구 박원규(2014년 작고)가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민을 왔다. 본국에서 창업했던 영화사 화풍흥업(1978~1993)이 군사정권과 제도적 압박에 못이겨 도산됐고 그 여파로 힘들고 지친 상태였다.
한국영화계에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며 미국에 와서 처음 몇 년간은 드라마나 영화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영화를 잊고 지내던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정창화감독 회고전’을 기획하며 그를 초청했다. 가지 않으려 했지만 후배들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바꿔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한국 영화계 발전에 공헌했다”며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많은 후배들을 만났고, 다시 영화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한국 영화계 발전을 돕기 시작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장편심사위원장(2007), ‘제16회춘사대상영화제’ 심사위원장(2008) 등을 맡아 한국 영화제를 돕는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뜻있는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번 태평양을 건넜다.
또 세계 영화무대에서 한국영화를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때마침 정창화 감독에 대한 재조명이 국제적으로 이뤄져 한국영화계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2004년 12월에 ‘홍콩필름아카이브’에서 회고전을 가졌고 이어 7월에는 파리 시장이 주최하는 ‘파리 시네마 인터내셔널’에서 ‘정창화 회고전’이 열려 <죽음의 다섯손가락> 등 다수의 작품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내며 상영됐다. 홍콩에서 활동하며 제작한 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 (1972)> 은 ‘2005년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선정돼 명실공히 세계적인 “고전영화”로 평가받았다.

대표작 <죽음의 다섯 손가락> 칸 영화제 클래식부문선정(2005)
미국 상영시 <사운드 오브뮤직> , <포세이돈 어드벤처>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차지,
1972년 이 영화는 미국 상영을 앞 두고 컬럼비아와 워너브러더스가 배급권을 놓고 경합을 벌였는데 워너브러더스가 개봉해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당시 <포세이돈 어드벤처> 와 <사운드 오브 뮤직> 을 제치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해 그 흥행의 규모를 알 만하다. 영국 등 유럽에서도 <킹 복서 king boxer> 로,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 이라는 타이틀로 각각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다.

미주 최초로 ‘LA한국영화제’, ‘샌디에이고한국영화제’ 개최
그는2010년 LA에서 ‘한국국제영화제(KOFFLA/Korean Film Festival in Los Angeles)’를 직접 만들었고, 뒤이어 ‘코리아시네마테크’ 재단을 설립해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샌디에이고한국영화제(SDKOFF)’를 주최, 무대에 올렸다.
정 감독은 미주지역에서 대표적인 한국영화제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로 이 영화제를 시작했으나 전문인력의 부재와, 사재 충당에 부담이 커지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영화제가 유지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의 영화 사랑으로 미국에서 최초의 한국영화제를 오픈할 수 있었음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국액션영화의 대부/ 세계에 이름 떨친 최초의 한인 감독
임권택, 정진우, 감독 등 걸출한 후배들도 키워내

1946년 최 인규 감독의 문하에 들어가 영화계에 첫 발을 들인 그는 홍성기, 신상옥 등 후일 한국 영화계의 거물들과 함께 연출부에서 일하며 촬영현장을 뛰어다녔다.
1950년에 감독으로서 데뷔작 <유혹의 거리> 를 만들기 시작했고 1977년까지 한국과 홍콩에서 50편의 영화를 그리고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인 ‘화풍흥업’을 통해 30여편등 모두 80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직접 제작했다. 임권택 감독과 정진우, 김시현, 전우열 감독 등 한국의 걸출한 후배 감독들이 그의 휘하에서 일을 배웠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장화홍련전(1956)’, ‘사랑이 가기전에(1957)’, ‘노다지(1961)’, ‘지평선(1961)’, ‘수색대(1964)’, ‘사르빈 강에 노을이진다(1965)’ 등 초기 걸작들이 있으며 ‘위험한 청춘(1966)’, ‘위험은 가득히(1967)’, ‘조용한 이별(1967)’과 같은 청춘, 멜로드라마 ‘황혼의 검객(1967)’ 등 사극 액션물이 있다.
1968년 당시 아시아 영화산업의 메카였던 홍콩 ‘쇼브러더사’에 전격 스카우트된 그는 쇼브라더스와 ‘골든 하베스트사’의 전속감독으로 액션과 무협영화를 만들며 국제적 명성을 얻는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91세에 보트 구입하고 직접 낚시 나서는 거장 정창화 감독
도전과 올곧음 낚아 후배들에게 나누고
“시대적 과제 앞에 용기를 가져야” 외침

정창화 감독(91)이 최근 낚시 보트를 한 대 샀다.
‘요동치는 본국의 현 정국과 예술계의 혼탁한 분위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낚시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결정한 일이다.
90년대에도 35피트 보트를 한 대 가지고 있었으나 처분했었다. 이번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보트를 구입했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보여준 존재감이 지금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928년 11월생이니 만 91세로 보통 사람들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닐 정도로 건강하지만 배를 직접 몰고 바다로 나가 낚시대를 던진다는 것이 그 나이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평생 영화인으로 살며 소중하게 여긴 ‘도전과 올곧음’도 함께 낚아 후배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영화는 세계를 하나로 만듭니다. 영화라면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문제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911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위대한 겁니다. 남들이 못하는 걸 해내고 있으니까요. 현 정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바른 말을 하는 마이클 무어(미국의 영화감독/사회개혁활동가)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의 어려운 사태를 지켜보면서 영화계 후배들에게 “시대적 과제 앞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그는 외치고 있다.



정관묵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