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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파워]스톡 브로커 재키 고

“투자의 원칙, 잃을 때는 과감히 버려라!”

클라이언트의 성격 정확히 파악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

재키 고는 배짱이 보통 두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증권업계에서 드물게 만나는 여성 스톡 브로커다.
이 세계는 위험부담(risk)이 크고 중독성이 있다는 점에서 도박(gambling)에 비유되지만, 실제론 철저한 분석과 냉철한 판단력에 의해 움직인다.
성공확률 거의 0%에 도전하는 도박사와 달리 현대 산업사회가 낳은 전문인이다.




공식적인 직업 이름은 투자 상담가(Investment Advisor). 그런데 기업이나 개인을 상대로 언제 어느 ‘증권’에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전문적으로 조언해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스톡 브로커라는 말이 더 광범위하게 쓰인다.


그녀는 이 직업을 갖기까지 매우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으며, 자신의 일과 인생에 대해서 놀랄 정도로 거침없고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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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성공했나요? 얼마를 벌죠?”

인터뷰를 요청하는 첫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거침없이 물었다.
인생과 일, 둘 다 얘깃거리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과, 톱 10에 오를 정도로 성공한 스톡 브로커라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재키 고가 근무하는 글로벌 증권회사(Global Securities corp.)를 향할 때까지 이 질문이 계속 내 귀에 웅웅거렸다.
사실 투자 전문가가 돈을 벌지 못하면 성공했다곤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릴 때 얘기부터 할까요? 좀 느슨하게 말이죠.

“어머니는 서울 사람이지만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가 군에 계셨어요. 그래서 맏이인 저는 경상북도 봉화마을에서 태어났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서울로 오기까지 강원도 장성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1975년 캐나다까지 오게 되었지요. 첫 정착지가 사스카추완 주에 있는 우라늄시티였어요. 우라늄이 많이 나는 광산도시라서 이름이 정말 우라늄 시티죠.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3천 명 정도의 민간인들이 관련 비지니스를 하면서 사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지금은 폐광되어 유령도시가 되었다더군요..”


-대학에선 무슨 전공을 하셨나요?

“거기서 한 1년 반 정도 살다가 에드먼튼으로 이사해서 알버타 주립대학을 갔죠. 그러다가 또 밴쿠버로 오게 되어 UBC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어요.”


- 이거 의외네요. 그런데 화가가 아니라 스톡 브로커라?

“어려서부터 발레를 배웠어요.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구요. 희한한 일은, 지금껏 한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는데 수학 과목은 항상 1등이었거든요.

대학에선 미술의 역사를 공부했는데, 그러면서 경영학을 부전공 했어요. 도무지 앞으로 뭐가 되야 할지 모르겠는데 … 부모님은 학교 시스템을 잘 모르시고 또 인생에 대해 조언해줄 만한 사람(mentor)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온 몸으로 부딪쳐가며 찾을 수밖에 없었죠.”


- 첫 번째로 찾은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독립심이 강해서 대학 때부터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어요. 첫 직업이 뭐였나? 학생 때부터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바텐더도 하고 그랬는데 … 아, 졸업하고 나서 첫 직장은 변호사 사무실이었어요.

Yang, Anderson & Company라는 회사에서 한국어 영어 둘 다 능통한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았어요.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일단 인터뷰라면 따내고 보는 성격이거든요. 그런데 무역 부서(Trade Development)로 배정되어 한국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어요. 우리나라가 처음 북미 시장을 개척할 때 ‘헐값으로 공격하는 덤핑’을 했다는 거 아시죠? 이것과 관련된 프로젝트(Anti-Dumping Matter)였죠.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보니 저 어디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중소 규모의 회사와 거래하려고 하지 않더라구요. 어쨌든 그 일을 통해서 해외개발공사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때 막 시작된 캐나다 투자이민 프로그램(1986년)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조직적으로 연계하게 된 것이죠.”


-오늘밤을 새도 모든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할 거 같아요. 단도직입적으로 … 언제 가장 큰 돈을 버셨나요?

“하하, 그 일 이후엔 컴퓨터 소프트웨어 세일즈 일도 했지만 작은 회사를 상대로 하는 일에 곧 재미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Asian America라는 글로벌 컴퍼니에 입사했어요.

일은 그야말로 go-for 였어요. 시키는 대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는 거요. 중요한 거래처 사람들이 오면 여행 가이드도 하고 파티도 기획하고 등등 그런 일이요. 그러다가 새로 스톡 마켓에 상장되는 회사 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 당시론 정말 큰 돈을 벌었지요. 저는 아직 어렸고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어요. 그래서 이후 3년 동안 미국 유럽 등지로 여행을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면서 책 읽는 게 지겨워지더라구요. 돌아올 때가 되었던 거죠.”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지만, 쉽게 실현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하셨군요. 어떤 계기로 성공적인 스톡 브로커로 변신하게 되었나요?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직업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에 합당한 경제적 대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밴쿠버로 돌아와 며칠 안 되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어요.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스톡 브로커 몇 명도 합류하게 되었지요. 문득 '아 저 직업을 아직까지 못해봤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맙소사! 스톡 브로커 자격시험이 불과 며칠 앞(1월 10일)에 있더라구요. 원래 코스를 이수하고 시험을 보는 건데, 무작정 등록하고 참고서 보내라고 하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다행히 시험에 패스(Registered Investment Advisor) 했어요.

뉴욕 월스트리스의 시간대에 맞추기 때문에 새벽부터 일하고 저녁 7시면 잠자리에 드는 브로커의 삶을 엿보았을 땐 ‘절대 저 직업만큼은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마치 운명처럼 제 자리를 찾게 된 거죠.”


- 스톡 브로커가 되는 데 특별한 학력이나 전공이 필요하지 않나요?

“재무분석가로 활동하려면 경영이나 경제학을 전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스톡 브로커라도 경영학이나 증권법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면 첫 출발이 다르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브로커즈 시스템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정도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위치가 달라진다는 게 매력적입니다.
제 경우에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쓸데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다양한 경험과 인간관계가 큰 장점으로 작용했지요. ”


-브로커즈 시스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저는 C.M. Oliver Company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 분야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 회사는 제가 입사하고 2년 만에 합병하여 Canaccord Capital Inc.가 되었어요. 현재 은행이 소유하지 않는 민간 증권회사로는 최대 규모입니다.
브로커만도 400명을 웃돌고, 한 명의 브로커마다 적어도 3명의 어시스턴트가 있지요.

증권회사의 체계는 크게 보아 분석전문파트(Research Division)와 상품관리파트(Sales division)로 나뉘는데, 스톡 브로커는 세일즈 디비젼에 속합니다.
100% 커미션 베이스로 운영됩니다.
한국과 달리, 기본급이 없지만 회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능력이 인정될수록 커미션이 50%에서 75%로 상향조정 되기도 하고 펜트 하우스에 사무실을 내주기도 합니다.
보통 전문 브로커는 연간 35만 달러에서 8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립니다.


탄탄한 회사에 소속되어 일할수록 정보력이 높아서 투자 성공확률이 높아지죠.”


-이 분야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돈도 번다’는 계명을 잘 지키는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고객을 선별 관리하며 어떻게 투자를 이끌어 냅니까?

“고객(Client)을 만났을 때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첫 계좌(Account) 규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덜컥 전 재산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특히 서양인들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재산을 분할하여 관리합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부동산에, 다른 일부는 순차적으로 그보다 리스크가 큰 증권에 투자하는 식이지요. 계좌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사보다 더 모험을 즐기고, 또 어떤 사람은 10만 달러에 목숨을 걸 정도로 작은 손실도 견디지 못하거든요.

전형적인 방법은 마치 미니 코스처럼 이 분야에 익숙해질 때까지 블루칩(blue-chip, 우량주) 위주로 소규모 투자를 유도하면서 점차 모험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브로커들은 나이 들수록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찍 은퇴해야 하는 직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캐나다에선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캐나다에선 오히려 경험 많고 노련한 브로커들이 최상위에 있습니다.
특히 파이넨셜 브로커들은 연륜이 중요하지요.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향입니다.
좋은 브로커는 기본적으로 머리 좋고 지식 많아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클라이언트와 브로커가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투자할 정도로 신뢰를 쌓아야 하지요. ‘High spree, high pays’가 감춰진 원칙입니다.
즉 버는 돈도 많지만, 쓰는 돈도 무척 많죠.”


- 특별히 요구되는 성격이나 자질은 무엇입니까?

“ 적극적인(Aggressive) 성격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화장품 사러 수퍼마켓에 갔다고 합시다.
점원이 설명서 읽고 있으면 신임이 안 가겠죠? 각 화장품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좋은 제품을 적극적으로 권유할 수 있어야겠죠. 그리고 추진력, 일단 올바른 선택이라 믿었을 때 그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끼리는 ‘gut’라고 하지요. 배에 힘을 딱 주고 버티는 배짱 말이에요. 특히 투자란 잃을 때도 있어요. 기다리다 보면 다시 오를 때도 있구요. 다만 ‘아니다.
확실히 잃을 때다’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깡통구좌’까지 가면 안 되죠.”


-모험적인 삶이지만, 큰 어려움이 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인생의 쓴 잔을 마셔본 적이 있나요?

“저는 항상 과거를 돌아보며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어요? 전 남편은 프로 레슬러였어요. 시댁이 스포츠 분야에서 상당히 알려진 집안입니다.


그런데 지금 13세인 딸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과 제가 함께 한 투자에서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가 다 되었는데 셋집조차 없었고 아기 양말 하나 살 돈이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헤어졌고, 그때 저는 법정 통역사 자격을 땄습니다.
…지금은 친구처럼 잘 지냅니다.
딸 시에라를 학교에서 번갈아 픽업하고 시댁도 자주 찾아갑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 남편 마이클 밀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누가 아이를 픽업할까 의논하는데 웃음이 화사하다.
인생에서 단 하나의 기준으로 성공을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자신하면서, 삶의 여러 각진 모서리를 여유롭게 반추할 수 있다면, 분명 성공적인 인생이다.


[재키 고의 이력]

재키 고(Jackie Y. Koh) = 2008년 1월부터 글로벌 증권(Global Securities Corporation)에서 투자 상담가(Investment Advisor)로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는 밴쿠버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Canaccord Capital Inc. 에서 10년 넘게 스톡 브로커로서 일했다.


경상북도 봉화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강원도 장성 등 여러 곳에서 성장했다.
이후 서울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 1975년 캐나다로 이민했다.
첫 정착지는 사스카추완 주의 우라늄시티였는데, 현재 폐광되어 유령도시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 무용 등 예능에 소질을 보인 그녀는 UBC에서 순수미술(Fine Arts)를 전공(BFA)했으나, 이후 매우 도전적이며 모험적인 ‘인생 탐색 기간’을 거친다.


대학 때부터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 첫 직장 ㅤㅇㅖㅇ & 앤더슨 법률회사(Yang, Anderson & Company)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다가, 1986년 한국에 파견돼 처음으로 캐나다 투자이민 프로그램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때 컴퓨터 소프트웨어 판매 일을 하다가 곧 그만두고 3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등지를 여행했다.


그리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와 마침내 평생 직업인 스톡 브로커(Registered Investment Advisor)로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한-영 법정 동시통역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 동안 백인 남성 중심의 이 직업 세계에서 Top 10에 랭크 되는 등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글, 사진=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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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쿠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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