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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 반병섭의 [세월은 추억의 창고]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8/06/24 08:46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는 쌍둥이의...

기독자의 삶이란 한마디로 ‘응답’하는 생활이다.
받은 사랑,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날마다 바쳐지는 삶을 산다.


나는 7세 때 아버지를, 12세 때 어머니를 사별하고 부모의 사랑에 굶주리며 소년기를 보냈다.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지독한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다.
다행히 15세 되던 때에 교회에 들어가게 되고 예수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교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고 그 아버지는 죽는 일 없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부모 없는 고아가 아니었다.


나는 일제(日帝)말기 징병(徵兵) 일기(一期)에 해당되었었으나 폐(肺)를 앓는 폐인(廢人)이 되어 군(軍) 소모품에도 해당되지 못했다.
해방 후 중공 팔로군(八路軍)도 끌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일찍이 죽어 없어 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었는데도 지금까지 건강히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질그릇의 영광’을 노래한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삶의 자국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다.
‘나는 쌍둥이의 형’, ‘어머니 내가 왔습니다’ 이 두 편의 장시(長詩)는 진솔한 나의 자전(自傳)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나으실 때
쌍둥이를 낳으셨다.

나는 형이 되고 그는 동생이 되어
-중략-
일제 말엽 내가 폐를 앓으면
동생은 식은땀을 흘리고
내가 쓰러지면 동생은 각혈을 했다.

내 창자가 비면
동생의 창자에선 쪼르륵 소라가 났다.

해방 후 만주에서 내가 기침을 하면
동생은 감기를 앓고
그래도 그 무법의 천지에서
전염병의 소굴에서
우리들은 용케도 살아 남았다.

-중략-
그 희미해진 내 쌍둥이의 이름
그 이름 두자는 “가난”이다.
“가난”
-하략-
내 쌍둥이 동생, “가난”이
내게서 떠난 후 그 동생은
맑은 혼으로 환생 해
새로운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심령의 가난한 쌍둥이로!
(<나는 쌍둥이의 형>의 부분)

-전략-
내가 스물 한 살 때
일본군대가 소모품으로 끌어가는
징병검사에서 나를 버렸고
해방 후 팔로군도 나를 버렸던
나는 폐를 앓는 폐물이었고
그 후 비적(匪賊)들에게 잡혔을 때에도
두만강을 건널 때에도 625 동란 때에도
아슬아슬 죽음이 피해주는
그 때마다 떠오르던 어머니의 환한 얼굴!
어머니의 천금같은
결코 그렇게는 죽을 수 없었던
하늘같은 이 아들은 이렇게 살아 남아
어머니 그리워 내가 왔습니다.

-중략-
어머니 돌아가신 후 나는 시집 안 간 둘째 누나와
둘째형과 형수의 사랑을 받았지만
서러웠던 날들과 숙명 같이 가난은 떠나지 않았고
언제나 남의 것이 되었던 양지와
언제나 먼데서만 뜨고 지는 태양을 등지고 살았던 그 아들
어머님 못 잊어 이렇게 내가 왔습니다.

-하략-
(<어머니 내가 왔습니다>의 부분)

내가 몽매(夢寐)에도 잊을 수 없었던 땅, 내가 나고 자라난 곳, 나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만주’를 나는 40년(1987)만에(그 후 세 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음으로 행복한 승리자 되어 꿈 같이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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