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아들이 진화했다
기밀 문서를 찿아냈다. 이사 갈 생각에 짐 무게 줄이려고 서재 정리하다 발견했다. 제법 양식을 갖춰 타이프 쳐 두 사람이 자필로 싸인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상황이 긴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너무 오래 되고 건망증이 오락가락 해 검증 및 기억도 아리송한데 상황이나 아들 녀석 행동거지로 미뤄보아 충분히 진위가 인정된다.참을 수 없는 발견의 기쁨에 아들과 딸에게 재빨리 문서 찍어 문자 날렸는데 대답은 헐! ‘12살 7학년, 2001년 사인, 공소시효 지나 법정효력 상실, 실제로 단 한가지도 실행 안 했슴’이라는 답신에 ‘엄마는 진짜 바보였어’라며 아들과 딸이 깔깔대며 웃는다. 얼마나 속을 썩이고 아들 키우는 것이 힘들었으면 이런 잔머리를 굴렸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호협력 체결은 무용지물, 노트북은 반납 안 됐다.
변호사 뺨치는 영어실력으로 요리 빠지고 조리 핑계 되며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하늘이 두 동강 나도 손에 넣는 자식을 어찌 견디랴! 공자 왈 맹자 왈 명심보감 보며 마음을 다스려도 세상에 이길 수 없는 것이 자식이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것이 자식이다. 배우자가 생기면 타인의 아내고 남의 남편이다. 자식과 부모 갈등의 진원은 욕심이다. 자식에 대한 애착, 욕심이 갈등을 부추긴다. 깨어있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되 그 사랑을 돌려주는 사람이다.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넘겨주는 부모 사랑이 참사랑이다.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 낳으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행하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키우면서도 지배하지 않는다.’ 노자의 도덕경 도경의 가르침은 부모가 명심해야 할 세가지 원칙에 속한다.
아들이 변했다.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식으로 밀어부치던 아들이 사람이 됐다. 누구 말도 안 듣던 옹고집이던 녀석이 무슨 일이던 ‘아내에게 물어보고…’라며 말을 흐린다. 깨소금이다. 그 뿐이랴. 집안 청소하고 아기 젖 먹이고 기저기 갈고 빨래하고 가정부가 따로 없다. 약간 삐딱한 마음이 들다가 얼른 고쳐먹고 ‘부디 네 마누라에게 잘 보여 행복하게 잘 살아라’라며 혼자서 웃는다.
인간의 진화는 늘 새롭다. 살아있는 것들은 진화한다. 진화는 생물이 원시적(原始的)인 것으로부터 고등(高等)한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제 욕구에만 충실하던 원시적인 아들이 사랑의 화살 맞아 헌신적인 남편, 자상한 아버지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브가 주는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사탄의 유혹 때문이 아니라 이브를 너무 사랑해 거절할 수 없었다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난다. 원죄에 빠져 생의 어둔 늪에서 허덕일 지라도 사랑은 생명을 잉태하고 영원히 진화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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