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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얘기] 지금 나를 만나는 방법(2)

매일의 생존 현장에서 나를 찾는 방법은 뭘까. 첫 번째 ‘성찰’ 과 두 번째 ‘삶의 목적’ 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고통’ 이다. 그렇다. 답이 역설적이다. 지금 당장 내 맘에 평화를 얻기 위한 해결책이 고통이라니. 이 무슨 궤변인가. 하지만, 고통은 나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잘 나갈 때’ 성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내면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어야 내면을 살펴보고 이 성찰이 이뤄져야 비로소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고통의 승화요, 고통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고통은 나만의 삶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 레시피’다.

고통과 실패로 몸부림치면 그동안 고정됐던 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돈도 명예도 내 맘대로 안되고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하면, 그렇게 보려고 해도보이지 않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바로 ‘내 안의 나’ 입구다. 그리고는 내면 탐구가 시작된다. 성찰과 삶의 목적이 평화를 얻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들이 비로소 시작되는 최초의 ‘불씨’는 바로 이 고통이다. 고통의 불씨가 있어야 성찰과 목적이 타오른다. 고통으로 성찰이 시작되고, 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드러나니 말이다.

물론 고통이 찾아왔다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탐구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고통의 내리막길을 술이나 마약, 기타 퇴폐적 유행을 따르는 향락주의자로 기운다. 인생 별거 있냐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자는 소위 ‘젊어 노새파’ 다. 또한 삶을 비관하는 허무주의도 주변에 수두룩하다. 하루 37명 내외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국의 현실이 말해준다.



고통이 왔을 때 삶의 목표가 없으면 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당연하다. 왜 사는지 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 사는 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가치가 사라진 거다. 고통과 실패를 성찰의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 의지의 단계 튼튼한 버팀목이 삶의 목적이요 목표다. 소중한 내 인생 ‘이렇게 살다 가겠다’ 는 삶 계획서가 필요한 이유다.

일단 처음 고통의 터널을 지나 자신의 삶을 주기적으로 바라보는 성찰의 단계에 들어서고, 또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평화가 지속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당장의 고통이 싫어 쉬운 길을 찾거나 맹목적으로 남들이 정한 가치를 다시 좇는다면, 만족과 불만족이 반복되며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가게 된다.

참고로, 행복과 평화는 다르다.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다. 행복은 일정 조건이 충족되어 얻는 일시적 자기만족이다. 충족됐던 조건이 사라지면 어제 행복은 오늘 곧바로 불행으로 바뀐다. 내 가게 한 달 매출 만불이 목표라면, 만불이 안 되는 순간 곧바로 ‘뚜껑 열린다’ 는 얘기다. 반면 평화는 조건 없이이유 없이 그저 지속되는 만족이요 기쁨이다. 당연히 조건이 없으므로 사라질 수도 없다. ‘저절로 샘솟는 기쁨과 평화’다. 믿기 힘들겠지만 꾸준한 내면탐구로 내 안의 본질과 함께하면 평화를 맛볼 수 있다(상세한 얘기는 앞으로 계속되는 칼럼에서).

개인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근 비교적 편해졌다. 물어봤다. 내게 달라진 게 뭐냐고. 한가지 답이 나온다. 바로 머릿속과 가슴속 ‘콘텐츠’ 다. 이 콘텐츠가 남들이 만든 가치 대신 새롭게 내가 만든 가치로 채워졌다. 지난해 남쪽 섬에서 만든 삶의 목적과 삶 지침서 내용이 점점 알차게 꽉꽉 들어차는 느낌이다. 그곳에서 시작된 성찰하는 버릇은 지금도 가장 큰 ‘낙’ 이다. 물론 이런 낙을 선물해 준 고통에게 대한 감사도 잊지 않고.

남들 쫓는 외적가치는 아닌 듯하고. 앞으로 뭘 하나 했는데. 생각보다 ‘나를 찾고 나로 사는’ 내면탐구가 꽤 일이 많겠구나 싶어 즐겁기도 하다. 아직 ‘내 안의 나’를 찾았노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계속적인 내면 탐구로 나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면 평화가 지속할 거란 ‘감’ 이 생긴다.

맞다. 지나보면 고통이 고통이 아니다. 고통이 나를 만나게 한다. 고통이 창조를 만든다. 고통이 위대함을 만든다. 고통이 평화의 원인이다. 고통의 승화가 기쁨이요 평화다.

‘능동적 망각’ 이랄까. 고통으로 변화된 ‘현재 힘’으로 과거를 달리 해석하는 거다. 지금 달라진 내면으로 과거의 고통을 재해석하고 껴안는 거다. 바로 이 능동적 망각은 고통으로 내면을 성찰할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 삶의 미래를 위해 ‘그까짓’ 과거를 재해석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말이다. 조금 과장하면 이제 고통이 생겨도 기대가 된다. 덕분에 성찰할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질 테니. 덕분에 삶의 방향을 약간 수정해 더 높은 삶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 덕분에 잠시의 행복이 아닌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맛볼 수 있을 테니.

이상 현실 생존에서 나를 만나는 방법을 나름 적어봤다. 한편, 영적 사상에서는 마음과 생각이 만든 에고의 세상을 허상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에고에 가려진 세상이며, 내 안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내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영적 깨어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영적 리더들이 말하는 에고 알아차리기. 형상의 세계에서 내 본질을 찾아 나가는 방법.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삶의 목적. 내 안의 본질을 만나는 유일한 공간 ‘이 순간을 살기’ 등. 들려줄 삶 얘기는 ‘무진장’ 이다.


정승구 칼럼니스트 /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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