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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희 칼럼] 그리움을 그리듯 ‘봄눈’을 듣다

1월의 마지막 날은 은사님이신 고 황병기 교수님의 이 주기였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시대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제 죽겠죠. 그러면 그걸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죽은 다음에까지 기억되고 그러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시린 공기에 눈 부신 햇살이 내려앉는 청량한 몇 날을 보내며 뭉근하게 차오르는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스승님과 배움의 시간들을 향한 그리움의 끝에서 ‘춘설’ 곧, ‘봄눈’을 들으며 선생님을 기려 본다.

춘설은 17현 가야금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새봄’ 중 가야금 부분을 떼어 낸 독주곡이다. 20세기 이래로 서양음악의 패러다임은 국악의 많은 부분을 전복시켰다. 그것을 둘러싼 갑론을박도 이제는 낡은 담론이 되었지만, 전통과 혁신, 보존과 창작의 경계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고뇌는 국악인들에게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옛것을 지키며 새로움을 창조’해야 했던 이들에게 전통 악기의 개량이 혁신의 한 수단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개량 가야금은 전통 가야금이 가지는 음량과 음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악기로 세상에 나왔다. 17현 가야금은 이런 개량 국악기의 초창기 버전이다. 요즘은 이조차도 고전이 된 지 오래고 25현 가야금 연주가 훨씬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현대 가야금 곡 가운데 하나의 빛나는 고전이 된 춘설은 선생님의 작품이다. 그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든 한국 문화예술계의 거목이자 선구자였음에 그 어떤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서구의 작곡 개념을 국악에 도입한 선생님의 작품은 “신비하면서도 시적 정서를 갖는 절실하고 매력적인 모티브”를 바탕으로 한다. 음악은 그 모티브로 집약되는 선율들로 구성되는데, 이 선율들은 전통적 가야금 산조의 음악적 특성과 같이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강한 응집력과 밀도를 가지고 짜여 있다. 선생님께서는 “선율의 어느 부분이든지 딱 띄어 놓고 볼 때, 곡의 처음부터 흘러내려 온 것처럼, 운명적으로 그 소리가 안 나오면 안 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느껴져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고유한 작품 세계는 이러한 정신에 기반을 두어 구축되었다.



춘설은 ‘1장 고요한 아침, 2장 평화롭게, 3장 신비하게, 4장 익살스럽게 그리고 5장 신명나게’의 다섯 악장으로 되어 있다. 음악은 화성이 서양 음악적 색채로 사용된 맑고 명상적인 선율로 시작된다. 이어 중중모리장단의 민요풍 선율을 지나 3장에 이르면 비로소 고요하게 흩날리는 봄눈의 정경을 듣게 된다. 이 신비로운 가락이 4장에서는 저음부의 빠른 반복 선율 위에 흐르는 익살스러운 고음의 선율로 연결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면 자진모리장단의 흥겨운 가락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불현듯 음악을 맺는다. 선생님께서는 이 곡을 “아직 눈이 오는 이른 봄의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그린 동심 어린 곡”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모든 곡이 그렇듯 춘설 역시 ‘황병기 음악’ 특유의 품위 있고 고상한 음화-어떤 대상이나 정경을 묘사하여 회화적인 인상을 주는 음악-이다.

“초스피드 시대의 세계에 정신적 해독제로써 특별한 가치를 지닌 음악”으로 표현한 음반 비평지 ‘스테레오 리뷰’의 평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황병기 음악’을 가장 선명하게 갈음한다. 대상이 무엇이건, 누군가이건, 어디이건 혹은 어느 때이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그리움을 안고 산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그 어떤 그리움이 밀려온다면 먹먹한 마음에 이 상서로운 봄눈을 담아 보시기를. 특별히, 특유의 담박한 공력이 배인 황병기 선생님의 연주로 감상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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