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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아버지와 집

집, 집이 사라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 짓기 위해 허물어졌다. 올해로 91세이신 아버지가 한 살에 이사하셨다고 했으니 자그마치 90년을 함께 한 집. 아버지에게는 90년이란 시간이 머물러 있던 집이라 허물어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충청도에 위치해 전형적인 중부지방 옛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집.

ㄱ자 형식의 안채는 커다란 대들보가 집 지킴이가 되듯 대청마루 위를 받치고 있고,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윗방, 툇마루를 앞에 둔 건넌방, 그리고 부엌.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사랑채와 아래채. 그동안 변화된 생활 방식에 의해 약간의 개조를 해 지내시기는 했지만, 외형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집이 허물어지기를 바랐고, 그것은 개조가 아닌 재건축에 의한 편리함 속에서 지내시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고하신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라도 아버지와 동행할 줄 알았던 집이, 90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집이 무너지는 데는 고작 2, 3일이면 충분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포크레인에 의해 무너져 가는 집 사진을 오빠가 보내왔다.

여름이면 풀 먹인 모시 적삼을 입고, 담뱃대 툭툭 털며 하얀 수염을 쓰다듬던 할아버지가 쓰시던 사랑채가 무너지고, 입춘대길, 건양다경 써 붙이던 커다란 대문이 사라지고, 손주 손녀, 증손까지 돌봐오시던 아래채가 팼다. 비 오는 날이면 대청마루에서 뛰어놀다 할아버지의 고함에 잠시 멈칫하다 다시 뛰던 내 어린 날의 풍경이 가득한 안채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아버지를 설득했던가. 그런데, 그만 눈물이 난다. 집이, 이젠 내 집이 아닌 내 어린 날의 집이 사라졌다.



얼마 전, 프랑시스 잠의 시를 공부하다 ‘식당’이란 시를 보았다. ‘식당에는 빛바랜 장롱이 하나 있다./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할아버지 목소리도,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어 온 장롱./ 이 같은 추억을 장롱은 충직스레 간직하고 있다./ 그 농이 아무 말도 할 줄을 모른다고 여기는 건 잘못이다./ 나는 그 장롱과 이야기를 하니까.’

그랬다. 오랜 시간 속에 처음에는 뽀얀 속살을 드러냈을 색 바랜 문짝들도, 재잘재잘 뛰어놀던 앞마당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왔고, 성장을 보아왔고, 추억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앉아 한 번씩 창을 읊조리셨다. “청산리 벽계수야~” 어쩌다 집안 할아버지가 놀러 오시면 두 분이 번갈아가며 벽계수를 집안으로 불러들이셨다. 밖에서 놀던 나는 장난스레 따라 불렀다. 그저 벽계수는 할아버지의 노랫자락일. 좀 더 큰 어느 날, ‘황진이’ 책을 읽다가 아. 벽계수. 내 할아버지가 당대 최고 군자라 불리는 벽계수를 무너뜨린 황진이의 격조 있는 구애 시를 읊조리셨다면, 난 좋아하던 툇마루에 걸터앉아 황진이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어간 이름 모를 도령을 상상했었다. 노랫소리를 함께 듣던, 애닮은 연가를 함께 읽던 그런 사랑채가, 나의 10대 어느 날이 꿈꾸던 툇마루가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무너져 가는 집 사진에 오래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공사 기간 중 딸네 집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가 이 사진을 보지 않으셨으면 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갔으니 15년밖에 살지 않은 나에게도 이렇게 서운하고 아쉬움으로 남는데, 90년의 세월, 아버지의 유년, 아버지의 청춘, 아버지의 온전한 삶이 있는 집이 사라졌으니 그 허전함은 어떠하시랴. 그동안의 완고함이 아버지의 고집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쉬움은 내려놓으시고 아버지가 오랫동안 새집 마당에, 뒤뜰에, 거실 천장에 목소리를 들려주셨으면 할 뿐이다.


김채은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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