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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아버지의 유산

곽애리 / 시인

저녁노을이 산 중턱에 걸리면, 멀리서 '따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 들려온다. 손톱 밑이 까맣게 되어 땅 바닥에 주저앉자 친구와 공기놀이 하던 조그만 계집아이는 고무신을 달빛 마당에 날리며 넘어질듯 미닫이 방문을 연다. 혼이 빨려 들어가는 휘파람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산 능선을 등에 지고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나타나는 카우보이, 허리에 찬 쌍권총, 검게 그을린 얼굴에 상대를 녹일 듯 바라보는 눈빛, 입에 삐딱하게 물려 있는 시가.

화면에 몰입하던 나는 눈물이 나올 듯,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숨이 아찔해져 나도 모르게 힐끗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퍼져나가는 시가연기와 방안 가득 아버지가 뿜어낸 담배 연기에 왠지 민망해진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진 발개진 나의 얼굴을 숨길 수 있어 안도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도 간혹, 아득한 나락으로 몰고 가던, 그 어린 시절의 물컹한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고민하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노스탈지아, 생의 회귀 본능의 감정의 덩어리였을 것이라고 꽤나 조숙해진 중3의 나는 뇌리의 기억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어떤 음악은 귀를 통해 들어왔다가 죽어도 잊히지 않는 그 날, 그 장소, 때론 그 사람이 되어 평생 환청처럼 가슴에 떨림으로 남는다.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면 아버지는 따라서 휘파람을 부셨다. 아버지는 가수처럼 노래를 잘 하시어 장기자랑에 우승자로 괘종시계를 타오시곤 하셨다. 기억은 다양한 매체로 연결 되어 가슴에 정점을 찍는데, 어떤 음식을 마주하면 그 음식을 특별히 좋아하던 사람이 순간 떠올라 밥수저를 들기 전, 잠시 머뭇거리게 되기도 하고, 그 어떤 사람은 특별한 향으로 가슴 한켠 오래 타기도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의 뿌리는 영화다.

유난히 서부영화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 황야의 무법자 같은 영화를 보며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게리 쿠퍼, 존 웨인 같은 배우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서부영화를 좋아하셨을까. 온몸이 사과처럼 붉어져 술 한잔도 못 마시고 강한 척 포장한 숨겨진 얼굴 뒤에 자기에 대한 연민을 마초근성의 남성상을 통해 대리만족 하신것일까. 아무튼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유일한 남자가 아닌 한 연악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인간에 대해, 남성에 대해, 삶에 대해 이해하며 성장한 듯하다.



정의감 넘치는 보안관 게리쿠퍼를 은밀히 이상형으로 꿈꾸며 은행털이, 창녀에게 기용된 총잡이. 현상금 수배자, 등의 다양한 소재로 각본마다 틀려지는 배우들의 의상, 음악에 탐닉하였다. 간교와 탐욕, 허세와 허무,배신으로 얽히고 설킨 인간 자체의 추악한 내면, 그러나 언제나 빛나는 정의가 절묘하게 녹아내린 인생사의 단편인 영화를 이해하기보다는,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하지만 절대 비겁하지 않고 장렬하게 죽는 최후의 남성의 비장함이 멋있어 보여 박수를 쳤고, 대사가 거의 없는 눈빛, 표정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깊은 남성의 미에 매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의 영화감상 취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그 곁에서 숨죽이며 들키지 않게 나의 감성을 길러 온 영원한 아이어른, 나는, 가을비가 내리는 오늘 유독 아버지가 그립다. 나에게, 남자, 남성스러움, 남자 이기 전, 한 인간, 총체적 사고의 영역을 트이게 해 준 아버지, 명석한 두뇌에 로맨틱한 감성의 소유자, 한 푼의 돈도, 한 뙈기 땅도, 자식에게 남겨놓은 것 없는 빈 손의 아버지, 한때 원망했던 미움의 아버지가 감사의 아버지로 이해되는 데 걸린 오랜 시간을 사죄한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남기고 간 눈물겨운 선물, 가슴 뛰는 정서, 아름다운 목청, 이 새벽, 아버지의 유산 앞에 낮은 감사의 기도로 엎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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