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교육 현장에서] 사랑이 듬뿍 담긴 할머니의 훈계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의 2020년 새해 목표는 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에 남으라는 쪽지(detention slip) 안 받는 거에요.”

전화로 주고받은 11세 외손자와의 대화의 일부다. 워낙 장난이 심해서 학교에서 “detention slip”을 자주 받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게 미리 전화로 새해 결심을 알려온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딸아이 집에서 지냈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딸네 가족, 아들네 가족이 함께 모이기로 했다. 4명의 손자손녀 중 제일 큰 외손녀가 14살이고, 제일 어린 손자가 1살이다. 딸애는 친정으로, 아들애는 친가로 온다고 하는 흐뭇한 기분으로 집 안 청소부터 하고, 식구들이 함께 먹을 음식 메뉴도 짜면서, 분주하게 명절 준비를 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슬하의 8남매들이 모이면, “너희들이 모두 내 분신이다” 하시던 생각이 나면서, 대를 이어 내려가는 자녀 사랑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위가 채식주의자이고 잡채를 특별히 좋아해서 나물을 골고루 준비하고 잡채도 야채 위주로 만들었다. 할머니가 정성껏 만든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을 온 가족이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우면서 맛있게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선물 풀기가 시작됐다. 조크용 선물을 먼저 풀면서 모두 깔깔거리며 웃음꽃이 피었다. 손자, 손녀들은 자기들 엄마, 아빠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하였다. 그중 딸아이가 10대에 들어섰을 때 선물받았던 여성을 위한 4개의 권고가 새겨진, 플라크를 보았다.

‘The Four Things A Woman Should Know: How to look like a Girl, How to act like a Lady, How to think like a Man, How to work like a Dog.’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요즈음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은 구시대의 권고였지만 손녀딸은 신기한 듯이 그 플라크를 읽었다. 현대는 여성과 남성을 떠나서 각자 능력을 발휘하여 자기의 위치를 인정받는 사회다.

커리어우먼은 자신의 직업에 열정을 갖고 행동하며 적극적으로 활동에 몰입하여 동등한 권리로 열심을 다 할 때 건설적이고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플라크를 자기가 갖겠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날 점심에는 빈대떡을 만들었다. 녹두를 갈아 참기름에 무쳐 놓은 숙주나물, 파, 당근을 잘 섞어서 부친 빈대떡을 아이들은 코리안 팬케이크라고 맛있다면서 내 목을 껴안고 즐거워하였다. 이어서 정원에 있는 석류나무에서 딴 무공해 석류를 따서 알알이 발라서 그릇에 수북이 담아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외손자 녀석이 맛있다고 제일 잘 먹는 것이었다.

외손자 녀석이 찬장에 넣은 쿠키를 꺼내다가 유리잔을 두 개나 깨트렸다. 제 부모가 야단치는 것을, 할머니인 나는 “얘, 그릇을 깨트릴 수도 있는데 크게 야단칠 것 없다” 하면서 손자를 두둔했다. 30여 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이 규율을 어기면 세 번 경고와 함께 가벼운 벌을 주고, 네 번째위반 시에는 부모에게 면담 요청을 보낸다. 부모와 상담을 하고 나면, 학생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역시 가정에서 부모, 또는 조부모의 사랑이 담긴 훈계가, 학교에서 받는 엄한 벌보다 더 큰 효과를 보는 것 같다. 하교 후 제일 먼저 만나는 부모 혹은 조부모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물으면서 잘한 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아이는 잘못한 점을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사람은 모두 부족하다. 할머니는 훈계자가 아니고 조력자다.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은 자녀들의 문제와 갈등을 해소하고 잘 양육하는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외손자 녀석에게 “아무리 장난치고 싶어도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방과 후 남으라는 쪽지 받아오면 안 돼” 라고 했더니, “네, 할머니. 이제부터는 조심할게요. 할머니, 사랑해요” 하면서 내 품속에 푹 안겼다. 이제 겨우 발걸음을 떼는 한 살배기 손자를 보고, '저 녀석도 10살이 되면 제 사촌 형처럼개구쟁이가 될지도 모르지'하면서 대견한 마음으로 꼭 안아주었다.

나의 기도대로 우리 가족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사랑을 듬뿍 나누면서 오래오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뜻 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 며칠 동안 명절을 보내고 떠나가니 온 집안이 허전하다. 남은 건 선물을 쌌던 찢어진 포장지와 열린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받은 선물들이다. 여기저기 남은 흔적을 청소하면서 ‘이것 또한 사랑을 쓸어 모으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정숙 이사 / 한국어진흥재단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