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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물 쥔 자 곧 권력... 미국 턱밑에서 중국은 '물'을 노린다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9/09 09:02



영국 정보부(MI6) 소속 앤디는 지금 파나마로 가는 중입니다.
잘나가던 스파이였지만, 장관 부인들과 염문을 뿌린 탓에 “돈세탁, 마약 밀매와 부패가 만연한 나라”로 좌천됐거든요.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의 한 장면. 영국 스파이 앤디가 파나마를 향해 가고 있다.

때는 1999년. 그의 임무는 미국에서 운하(육지를 파서 강 혹은 바다를 잇는 물길)를 돌려받은 파나마 정부를 감시하는 일입니다. 앤디는 상류층의 양복을 만들어 유명해진 재단사 해리에게 접근하죠. 그리고 그의 약점을 잡아 운하 정보를 빼내오라고 시킵니다.
하지만 고급 정보를 알 턱이 없는 해리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죠.

“파나마 대통령은 운하를 중국에 팔려고 한다네.”

아 … 이 거짓말은 미국에 흘러 들어가고, 마침내 전투기까지 출격합니다.
블랙 코미디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 얘기죠.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왜 이토록 운하에 집착했을까요?


영화 '스틸 라이프'. 중국의 거장 지아장커 감독이 연출해 극찬을 받았다.

낡디낡은 셔츠를 입고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는 앤디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넓은 강. 저 아래, 남자의 과거가 잠겨 있죠.

한산밍은 16년 전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 이곳 싼샤 댐까지 왔습니다. 아내를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고, 그는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철거 일을 시작합니다. 댐을 짓기 위해 건물을 부수는 일이죠.

그러는 동안 정작 집을 잃은 이곳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갑니다. 세계 최대라는 중국 싼샤 댐(2006년 완공)을 무대로 한 영화 ‘스틸 라이프’의 시작입니다.

운하와 댐은 한 사회가 수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대표적 방법입니다. 어마어마한 돈과 노동력이 든다는 공통점이 있죠.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열한 번째 시간은 바로 이 ‘물’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라오스 댐이 붕괴되며 물에 잠긴 마을 [신화=연합뉴스]

지난 7월 라오스의 한 댐(강ㆍ바닷물을 막아 두기 위하여 쌓은 둑)이 무너져 수백명이 숨졌습니다. 댐 건설에 한국 기업이 참여한 탓에 국내에서도 이슈가 됐는데, 이 비극 뒤에는 ‘메콩강 이권 다툼’이 있었죠.

메콩강은 중국ㆍ미얀마ㆍ라오스ㆍ태국ㆍ 캄보디아를 지나 베트남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는 강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상류에 있는 중국이 마구잡이로 댐을 짓기 시작한 겁니다. 함께 쓰는 물을 독차지하니 다른 나라들은 열불이 났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뾰족한 수가 없는 가운데, 중류 지역의 라오스도 대규모 댐 건설에 나섰습니다. 수력 발전 전기를 팔아 가난한 나라 살림에 쓸 요량이었죠.
댐이 자꾸 생겨나자 부작용이 속출했습니다. 환경 오염은 물론이고, 하류 지역에선 물이 부족해 농사를 망치는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났죠.

한마디로 중국이 ‘물’을 제 손에 쥐려고 하는 바람에 메콩강 인근 국가들이 난리가 났다는 말입니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아직 조사중이지만 무분별한 댐 건설 자체를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죠.

여기까진 많이 나온 얘깁니다.

그런데요, 중국이 탐내는 ‘물’이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물 욕심’은 이미 태평양 건너까지 뻗었죠.
중국은 대체 왜 이리 ‘물’을 쥐려 할까요?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 속 한 장면. 스파이 앤디(오른쪽)는 재단사 해리를 협박해 정보를 얻으려 한다.

인류 4대 문명은 모두 강에서 시작됐습니다. 강은 인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논밭에 물을 잘 끌어오고 홍수ㆍ가뭄에 대처하는 일이 농경사회의 핵심이었죠. 다스리다는 뜻의 한자 ‘치(治)’가 ‘물을 다스리다’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입니다.

논밭에 물을 대는 걸 넘어 물길을 만들고 통제하는 자, 즉 ‘물을 쥔 자’는 드넓은 땅을 통치하는 세력이 됐습니다.

7세기 초 중국이 그랬죠.
수나라는 황허 강과 양쯔 강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는데, 덕분에 ‘산 넘고 강 건너야 하는’ 험난한 육로보다 훨씬 빠르고 싸게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내륙 수상 운송망인 대운하”는 “중국이 중세에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문명이 되는 데 공헌”(책 『물의 세계사』)했죠.


중국 대운하 [사진=위키피디아]

중국에서 ‘강을 쥔 자’가 제국을 다스릴 때, 유럽에선 ‘바닷길’을 잡는 이가 승자였습니다. 육지 수자원이 마땅치 않았던 그리스ㆍ로마 문명에선 지중해 패권을 누가 쥐느냐가 중요했는데, 그게 바로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은 각각 다른 길을 택합니다.
중국은 대륙의 운하만으로도 풍부한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고, 북방 민족(몽골 등)을 경계하는 데 바빠 해양 진출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중국이 쇠퇴한 이유로 꼽기도 하죠.

그러나 분열된 유럽 국가들은 바닷길을 뚫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후 극에 달했죠.

이른바 대항해 시대, ‘바닷길’을 둔 싸움 끝에 영국이 승기를 잡습니다. 강력한 해군력으로 ‘팍스 브리태니카’(19세기 대영제국 황금기) 시대를 연 거죠. 산업혁명이 뒷받침됐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으니 … 역시, ‘물길’이었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영국은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이집트 수에즈 운하(1869년 개통)를 차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결국 손에 넣습니다. 이후 떼돈을 벌고 세계를 지배했죠. 영국에서 물건을 실은 배가 인도에 가려면 아프리카를 빙 돌아 석 달이 걸렸는데, 운하를 통하면 3주밖에 안 걸렸거든요.

그런데 남들이 미친 듯 삽질해야 가질 수 있었던 운하를 자연이 하사한 나라가 있었으니 …

네,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중부에는 남북을 가로질러 멕시코만까지 길게 뻗어있는 ‘천혜의 운하’ 미시시피 강이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강을 수송로로 이용하고 척박한 서부에는 다목적 댐을 지어 빠르게 산업을 발전시켰죠.

하지만 미국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배로 자유롭게 오가고 싶은데, 남아메리카를 돌아가는 방법뿐이었거든요.
결국 1914년, 미국은 중미 국가 파나마를 꾀어 운하를 만들고 운영권을 쥡니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되었고,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책 『물의 세계사』에서)

파나마 운하 [중앙포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온 겁니다.

수십 년이 지나 미국이 파나마에 이 운하를 돌려준 후, 얼마나 아까워했는지를 그린 영화가 바로 ‘테일러 오브 파나마’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국은, 파나마가 운하를 중국에 판다고 하자 전쟁을 불사하죠.

막연했던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걸까요?
중국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싼샤 댐 등으로 내륙의 발전을 꾀하는 한편, 남쪽에선 메콩강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이미 댐 6개를 건설했고 앞으로 20여 개를 더 지을 계획이죠. ‘일대일로’(육ㆍ해상 실크로드)의 일환으로 파키스탄 항구에 중화도시를 만든단 계획도 내놨습니다. 인도양으로 나갈 항구를 ‘접수’하겠단 거죠.

중국의 야욕은 미국 턱밑까지 치고 들어왔습니다.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 속 한 장면. '파나마가 운하를 중국에 팔 것'이라는 주인공의 거짓 정보가 점점 일을 크게 만든다.

파나마 위에 있는 니카라과에서 이미 운하 건설ㆍ운영권을 확보했거든요.
공사는 지지부진하지만, 그 운하가 완성돼 중국이 운영하게 되면 중남미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매우 커지게 됩니다. 한 세기 전 미국처럼요.

최근 파나마, 엘살바도르 등 중미 국가들이 앞다퉈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손잡고 있는 것도 미국을 불안하게 하고 있고요.

물론 강대국이 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는 물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물을 쥔 자’가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죠.
과연 21세기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지난 7월 라오스 댐 붕괴 당시 마을이 물에 잠겨 대피하고 있는 주민들 [로이터=연합뉴스]

씁쓸한 것은, ‘천하 제패’를 꿈꾸는 권력자들이 운하를 탐하고 국가가 ‘공익’을 내세워 댐을 짓는 동안 상처받는 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수나라 시절 운하 노역에 동원돼 죽어간 사람들은 수십 만에 달했습니다. 스스로 상해를 입혀 노역을 피할 정도였죠. 수에즈 운하 건설 당시에도 목숨을 잃은 이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파나마요? 정부는 운하로 돈을 벌었지만,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죠. 이번 라오스에서 숨진 이들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서 미군 폭격에 다치는 건 민간인입니다. ‘스틸 라이프’의 주인공 한산밍 또한 정든 동료를 잃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죠.

영화 '스틸 라이프' 속 한 장면.

저 거대한 댐이 나라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한산밍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다만 그는 그리울 뿐이죠. 아내와 딸, 그리고 뿔뿔이 흩어진 정다운 이웃들이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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