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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돌고 도는 285번 순환도로

살얼음이 깔렸던 길섶에 말간 햇살이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벌벌 떨게 했던 추위 때문에 거의 한 주 이상 집 안에만 머물렀던 탓이었는지 아침부터 창밖 풍경으로 자꾸 눈길이 갔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엿가락 체질을 가진 탓에 여름 휴가는 꿈도 못 꾸는 나 같은 중생에게 겨울은 할 일 다 접어두고라도 아무 데나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계절이기도 했다.

꼭 이유를 달지 않더라도, 굴러가듯 사는 일상의 판박이에서 한 번쯤 툴툴 털고 나오고픈 유혹에 흔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5도, 손끝으로 톡 치면 쨍! 하며 울릴 것 같은 유리 하늘과 코끝에 와 닿는 찬 공기에 가슴 속 온도까지 뚝 떨구는 듯했다. 이 추위에 중늙은이 혼자 공원을 걷기는 무리수가 되겠고 차라리 차를 몰고 달리기로 했다.

커피숍에 들러 뜨거운 커피 라떼 한 잔 샀고, 파바로티의 CD를 차 오디오에 걸었으니 준비는 끝난 셈, 하이웨이에 들어서니 눈앞에 텅 빈 길이 펼쳐졌다. 쭉 뻗은 도로 위에 내려앉은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강추위에 차들도 숨어버린 저 도로의 고요함, 온 세상을 얼려버린 듯 매혹적인 겨울 풍경이었다.

인생은 길과 같다고 말해주었던 분이 있었다. 그분의 손녀와 딸애가 같은 학원에 다녔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차 안에서 딸애를 기다리는 내게 어느 날 차나 한잔 같이하자고 했다. 겉으로 느껴지는 나이 차가 커서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할 수 있는 마땅한 이유를 댈 수 없어 따라나섰었다. 찻집에서 그분이 말했다. “ 인생이란 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어느 길을 택해 달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가끔 먹고 사는 일이 힘들게 느꼈을 때 나는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삭막한 마음을 달랬었다”고.



나 역시 가끔 I-285 순환도로를 차를 타고 달린다. 285번 순환도로는 말 그대로 시작과 끝이 연결된 고속도로다. 전체 길이는 65마일 정도, 떠났던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다. 괜히 심사가 허전할 날, 생각을 매듭짓지 못해서 마음이 웅성거리는 날, 285번 순환도로를 한 차례 돌다 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곤 했다.

사춘기도 아닌 나이에 무슨 감상적인 대처법이냐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분들이 내 주위에 의외로 많다. 애틀랜타로 이사 온 후 알게 된 교우 한 분도 이민 와서 사는 동안 285번 도로를 달리지 못했더라면 아마 외롭고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언젠가 친구가 왜 하필이면 285번 고속도로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이라고 대답했었지만, 285번 고속도로의 매력은 달리고 달려도 결국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285번 순환도로를 달리는 습관 같은 취미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달리고 돌아오면 내 감정의 노폐물이 걸러진 듯 마음이 가뿐해진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누구든 감정적인 생각에 휘말릴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너무 절박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무작정 달아나고 싶었는데, 한참을 달리다 보니 다시 그 자리에 와 있었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핑계. 살다 보면 살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찾으려 달렸던 285번 순환도로에서 나는 오늘 어떤 마음 하나를 버리고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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