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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가을이면 부는 바람


아아, 가을빛이 너무 좋아 어디론가 가고 싶다. 들뜬 마음을 누르고 일터로 향했다. 한 손에는 커피잔, 팔꿈치에는 핸드폰을 낀 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선 컴퓨터 스위치를 올린다. 책상 의자에 몸을 부리고 모니터 화면이 켜지길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는 일, 매일 반복하다 보니 이젠 내 모습이 되어버린 습관이다.

이메일을 확인하려다 무심코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한국에서 출판사를 하는 지인이 올린 짧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립다는 말 대신’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실감해요 /연락한 지 오래되어 /전화번호가 기억나나 싶어서/ 안부 메시지 보내 봐요/ 잘못 전달된 메시지이면 죄송하지만 무시해주세요.’

예순 살의 고지를 눈앞에 둔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머리칼이 허옇게 센 남자가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천연덕스럽게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출근길 앞서 걷는 사람의 옷자락에서 문득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리고는, 소원해진 관계
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걸까. 퇴근길 물든 가로수 사이를 지나치다가 문득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았던 걸까. 그러잖아도 서늘해진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마음이 헛헛했었는데, 시(詩)도 아니고 낙서도 아닌 것 같은 짧은 글 하나에 내 마음이 큰 위안을 받다니, 참 묘한 일이었다.

지나온 생이 밋밋해서 한 서린 사연이 없다 쳐도, 특별한 추억 하나쯤 가슴에 품지 않고 사는 사람 있을까. 완치된 듯하다가도 가을 바람 서늘해 지면 어김없이 도지는 재채기처럼, 되풀이 하다보니 결국 고질병이 되어버린 가을 바람. 도대체 감정이란 건 늙지도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쿡쿡 뼈마디가 쑤시는 나이에도 퇴색하는 낙엽수 떨듯 마음을 술렁이게 하다니. 또다시 10월, 가을이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가을은 회상의 계절이다. 미처 소화하지 못했던 것들을 꺼내어 되새김질하듯이, 무심코 지나친 일을 반추하게 하는 계절이다. 한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친구를 불러내서 매콤한 굴 순두부 한 그릇 먹이고 싶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지인과 저녁 햇살 길게 누운 공원 길을 나란히 걷고 싶은 계절이다. 그것뿐이랴.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련된 카페에서 해물을 듬뿍 얹은 파스타에 가을 햇살에 물든 단풍처럼 붉디붉은 와인 한 잔을 시켜 마시는 허영도 부려보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 석 달 동안 연거푸 상(喪)을 치른 친구에게서 함께 점심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혹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행여 아직 덜 아문 상처를 다치게 할까 봐 망서렸지만, 내심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약속장소로 냉큼 달려나갔다. 가을빛에 물드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에 우리네 인생도 가을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진부하기 그지없었을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치 책을 읽다가 네온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을 만큼 좋은 글귀를 만난 것처럼 마음에 쏙쏙 박히다니.

이민자의 삶이라 서둘러 채우려 했던 물질의 곡간과 업적을 자랑하기보다는, 마음 깊숙이 숨겨 두었던 아픈 이야기를 꺼내 놓는 친구. 어쩌면 그가 지닌 해박한 지식만으로 자신을 감추며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련만, 허튼 이야기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친구의 절제된 표현 속에서 한 장 한 장 물든 잎을 떨구며 천천히 자신을 비워내는 가을의 섭리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가을이 오면 바람이 들까. 멋진 카페에 가을꽃이 놓인 식탁에 이탈리아풍의 파스타와 붉은 와인이 아니면 어쩌랴. 한 잔의 보리차로 목을 축이고 우거지 갈비탕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웠어도, 늘그막 세월을 자기 생각과 마음과 감정까지 오롯이 내어주는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행운, 사는 동안 오늘처럼 행복한 가을날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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