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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 고종(高宗)의 도망길

전 아칸소대학 정치학 교수 수필가

댈러스에 사는 아들 집에 갔다가 우연히 운전하며 들어선 길 이름이 ‘월튼 워커 대로(Walton Walker Boulevard)’라고 했다. 월튼 워커는 6.25를 겪은 세대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그 별명이 ‘불도그’로 알려진 2차 대전의 영웅이고, 한국전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와 함께 미 8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전쟁 초기에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파죽지세로 밀렸으나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을 ‘죽기 살기(Stand or Die)’로 사수해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케 하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저지한 명장이다. 그해 겨울 최전방에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하다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한국에도 있고 서울의 워커힐호텔, 워커힐아파트가 모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는 그가 텍사스 출신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길 이름을 대통령이나 유명인사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다. 워싱턴, 링컨,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는 이름이고, 프랑스에서는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프랑스 전국 어디에나 흔한 길 이름이다. 한국에서 인명을 거리 이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으로 된 도로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다. 을사늑약 때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붙인 충정로,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딴 을지로,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온 충무로, 세종대왕의 세종로, 이황의 호로 지은 퇴계로 등등.

요새는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의 이름 붙이기가 유행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이름을 딴 ‘동탄 지성로”가 수원에 있고, ‘전국노래자랑’ TV 프로 MC를 오래 한 송해도 종로에 ‘송해길’이라는 명예 도로를 얻었다. 성남시 분당에는 가수 ‘신해철 거리’도 금년에 생겼다. 아직 ‘이승만 길’이나 ‘김대중 길’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이념 대결의 극단적 양극화가 현주소인 한국의 정치·사회 분위기에서 대통령 이름을 붙이기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직업은 한국 대통령이라는 비아냥도 있고 오늘의 영웅이 내일은 역적이 되는 세상 아닌가. 최근 제주 서귀포시에서는 ‘5.16도로’의 명칭을 변경하려는 주민 의견 수렴에 착수했다는 보도도 있다. 유신 시대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전부터 계속되는 개명 운동인데 논란이 많다.

몇 달 전에 서울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고종의 길’이 생겼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기세등등하던 일본 앞에서 겁에 질려 공포에 떨던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하거니와, 덕수궁 돌담길에서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정동공원까지 120m 거리다. 문화재청이 이 피신로를 복원해 ‘고종의 길’이라는 새로운 명소(?)를 탄생시켰다. 고종은 그 후 1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그 안에 마련된 임시 사무소에서 국사를 처리했다. 러시아의 간섭도 많았고 러시아는 어업, 삼림, 금광 부문에서 이권을 챙겼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 ‘고종의 길’ 하면 고종이 즐겨 산책하던 길, 아니면 고종이 조성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일반적으로 길 이름은 이름 붙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모범을 후세에 알리고자 함이나 ‘고종의 길’은 그게 아니다. 망해가는 나라의 무능한 군주가 구명도생(苟命圖生)하기 위해 도주한 길이다. 부끄럽고 욕된 길이다. ‘고종의 길’보다는 ‘고종의 도망길’이나 ‘고종의 도주로’가 더 정확한 이름이 아닐까. 그 후 조선이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기까지는 10년이 채 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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