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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 검여(劍如)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서예의 대가다. 추사 김정희 이래 존재치 아니하였던 한국 최고의 서가로 꼽힌다. 그는 칼같이 날카롭고 돌같이 견고한 필치를 이상으로 삼았고 그가 ‘칼날 같다’는 의미인 검여(劍如)를 아호로 정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환갑을 두 해 앞둔 한참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져 우반신이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고 추사를 넘어 한국 서예의 신경지를 완성하려는 그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이 벌써 반세기도 전 일이다. 그 후 절망을 떨치고 불편한 몸으로 악전고투 끝에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하여 격조 높은 왼손 글씨의 새 경지를 열었다. 좌수 전시회도 했고 좌수 글씨만을 엮은 서예집도 출간했다. 병의 재발로 1976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생애 마지막 8년간 그가 보여준 불굴의 투혼과 각고의 노력은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바 크다. 그의 인간승리의 실화는 매스미디어를 타고 세상에 알려지고 ‘인간만세’라는 방송 프로에 보도되기도 했다.

내가 검여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대학 다니던 196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여 선생을 아시던 내 선친을 따라 인천 시천동 검여 선생댁을 찾아 선친께서 검여 선생께 “이놈 글씨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셨다. 먹 가는 법, 붓 잡는 법으로부터 시작하여 획 긋는 법, 낙점하는 법까지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 글씨 몇 자를 써 주시고 집에 가서 연습한 후 마지막에 정서해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 댁에 들어서면 인사를 받으신 후 언제나 한결같이 “좀 쎴나?” 하셨다. 선생님은 ‘썼나’를 ‘쎴나’하셨는데 사투리인지 그때는 별 신경을 안 썼다. 그리곤 연습해온 글씨를 검토하시고 고칠 점을 지적해 주셨다.

그 당시 선생님은 중국 조지겸 류의 육조체에 몰두해 계셨고 나에게도 그 체를 배우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온화하시고 과묵하셨지만, 글씨를 가르치실 때만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하시곤 했다. 글자를 촘촘히 써야 할 곳에서는 획과 획 사이에 바늘구멍 들어갈 만큼만 틈을 남기라 하셨고 획 사이에 공간을 많이 남겨야 할 곳에서는 획 근처에 소 몇 마리를 맬 수 있는 여백을 두라 하셨다.



내가 선생님 댁을 드나들 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내가 뵐 때마다 방바닥에 화선지를 놓고 무엇인가 쓰고 계신 것이었다. 늘 손에 붓을 들고 사시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때 이미 국전 서예 부문에서 특선을 거쳐 국전 초대작가, 국전 심사위원으로 서계에서 그 이름이 쟁쟁하실 때였다. 선생님처럼 유명한 분도 그처럼 매일 글씨 연습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정서해 온 글씨를 검토하시고 고기 ‘어(魚)’자를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시더니 화선지를 깔고 글씨 한 폭을 쓰시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방금 쓰신 것을 옆으로 옮겨놓으시고 똑같은 글을 새 종이에 다시 쓰셨다. 두 번째 글씨를 아래위로 훑어보신 후 “이게 좋겠군!” 하시며 ‘태종수에게 상으로 준다(太鍾秀君 賞之 )’라고 발문을 달고 낙관을 찍어 주셨다. 중국 당나라 시인 왕지환(王之?)의 등관작루(登?雀?)였다. 그 시의 마지막 두 구절 ‘더 멀리 보고 싶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가 면학을 장려하는 의미가 있다. 계속 열심히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뜻이 담긴 글이다.

그 후에 선생님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검여 서원’을 차리시고 후학을 지도하셨다. 그곳에도 얼마 동안 다니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던 나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서예 학습을 중단했다. 군 복무 끝내고 미국에 유학 온 후에야 나는 선생님에게 닥친 비극과 좌수서로의 재기를 알게 되었다. 내가 학위 끝내고 귀국했을 때는 선생님은 이 세상에 아니 계셨다. 선생님에게 흠(?)이 있다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두주불사 통음으로 어떤 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실 때도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런 애주벽이 고혈압이신 선생님의 뇌출혈과 때 이른 비극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 서예계는 추사 이래 최고의 명필을 너무 일찍 잃었다. 벌써 반세기 전 일이건만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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