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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곳 시카고에 정착하면서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었는데 변하지 않는 게 있지요. 기억이라는 창고에 산적해 있는, 그곳에 있는 책장의 서랍을 살며시 열면, 얼굴 생김새, 특별한 표정,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 차분한 목소리, 느려빠진 걸음걸이도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지요. 함께 있었던 장소, 만남의 분위기, 특별한 대화, 어려웠던 상황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채 끄집어내 볼 수 있는 신기한 창고이지요. 함께였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새로운 것들을 접했던 시간들이어서 잊을 수가 없답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기도 하고, 때론 들리기도 하고, 어떨 땐 너무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어쩐 일일까요.

대학축제 마지막날 난 운동장 위쪽에서 이제 곧 첫번째로 정문을 통과하게 될 마라토너를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죽고 못 살 한 친구가 열심히 준비해 마라톤에 출사표를 냈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눈길이 정문을 향해 쏟아지던 순간 한 선수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뛰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앞만 보고 결승점을 향해 뛰어야 할 그는 뛰면서 이상하게도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속도를 줄이고 있었지요. 급기야 뒤를 돌아 꺼꾸로 트랙을 뛰어가고 있었고, 그 순간 정문을 막 통과해 들어오는 또한 선수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는 많이 지쳐있었고,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어렵게 어렵게 움직이는 듯 했어요. 그 순간 운동장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거꾸로 트랙을 뛰던 선수가 어느새 지쳐있는 친구의 어깨를 감싸고 그와 보조를 맞춰 천천히 결승점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었지요. 운동장에는 걸음을 뛸 때마다 박수소리가 가득했고 그가 오랜 시간을 걸어 결승점을 통과 했을 땐 이미 여러명의 주자가 그의 어깨를 툭 툭 건드리며 그를 지나쳐버린 후였습니다. 누가 결승 테이프를 끊었느냐는 제겐 중요하지 않았죠. 여전히 간간히 들리는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면서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장면은 흔들리는 나를 세워 주었습니다.



내게로만 향했던 시선을 내 이웃을 향해 돌릴 수 있는 마음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날 선 시선으로 한치의 손해도 볼 수 없다며 목청을 돋구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는, 기막히게도 이그러져가는 세상 속,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낸 아름다운 장면 하나. 지구의 반대편 희끗희끗한 장년의 나를 다시 혹한의 겨울 앞에 내몰았습니다.

몽롱해지는 따뜻함에서 다시 차가운 눈길에 서야지. 얼어 붙은 들판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너희를 지날 땐 노래를 불러야 해. 우리를 이해시키려는 많은 이야기는 필요치 않아. 내 눈을 가능한 한 내게로부터 돌려야 해. 나만을 위해 쉼 없이 달려 마침내 성공했다고, 다 이루었다고, 행복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해. 그건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이유는 나만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길이 소외되고 외로운, 지쳐 쓰러지는 이웃을 향해 돌려지는 것이야. 그래서 순간마다 나를 돌아보아 지은이의 마음을 다시 읽어 내리는 일이야. 눈에 보이는 최고의 자리를 내려놓고 힘든 친구의 어깨를 부축이며 걸었던 멋진 마라토너의 기억 위로 눈발이 날린다.

지구의 반대편에 서있는 한 사람 그 눈을 맞으며 말한다.

"눈 내리는 눈길에 서 본 사람은 알지. 어떻게 길이 생기고 지워 지는지를.
어떻게 아름다운 세상이 오고 또 지는지를...."

다시 눈길이다

난 아마 거리의 한 모퉁이
쏟아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지
나의 발은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채
눈에 쌓여가는 마을
하얗게 변해가는 들판에 서서
나에게 묻고 있었지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눈꽃을 활짝 피운 나무가지 사이
손을 쥐었다 펼 때마다
하늘이 내려앉았지
아픔의 소리도 공허한 거리
형체가 사라지는 길
커다란 당신 앞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될까
엎드린 들풀이 될까
흩어지는 연기가 될까
걸어온 발자욱 덮어져 희미해지고
이제 당신 앞에서 다시 시작이다
하얗게 펼쳐진 다시 눈길이다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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