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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밤새 내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던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커피를 내려 데크로 나간다. 나무냄새, 풀냄새가 헤즐러 커피향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촉촉한 아침 기운에 몸과 마음은 푸르게 깨어난다. 초록이 짙은 뒤뜰엔 노랑 물감을 풀어놓은 듯 이제 막 한창인 Lysimachia가 저만치서 나를 반긴다. "좋은 아침, 지난밤 내린 비에도 잘 견디어 냈구나." 눈을 돌리니 Salvia nemorose의 보라뭉치의 긴 대궁들이 빗물의 무게에 기울어진 채 내게 눈을 맞춘다. 하얀 Daisy 식구들도 깨끗하게 얼굴을 씻고 환하게 빛나고 있다.

이른봄 연둣빛 꿈들이 온통 대지를 막 흔들어댈 때 봄을 시샘하듯 눈이 내렸다. 새싹들이 얼고 움 트려던 가지가 움찔하던 때였다. 그때 쌓인 눈 틈 사이로 연보라 꽃잎을 내밀며 윙크 작렬하던 Periwinkle의 감동. 나의 정원에 첫번째 피어나 나와 인사를 나눈 손톱만큼 작은 꽃. 그 후 봄이 깊어갈 때까지 나지막히 꽃들을 피어내던 정겨움. 볼품없는 잎사귀만 보면 잡초 같아 눈길도 안 가던 어느날인가 푸른 꽃망울을 내더니 이내 짙은 보라빛으로 정원을 바꾸어버린 Bugle herb의 기적 같은 생명력은 아직도 생생히 마음에 남겨져 있다. Iris의 곧게 뻗은 잎사귀, 붓끝에 보라색 물감을 발라놓은 듯한 꽃망울, 꽃잎을 나비같이 펼친 우아하고 수려한 자태도 이젠 눈에 띄지 않는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눈부신 것들 속에 무엇이 있을까 두리번거렸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겨운 것들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남는다. 시들해진 꽃잎이 떨어지고 난 후 그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벌 나비도 찾아오지 않고 휑한 가지는 차라리 을씨년스러웠다. 떠나간 것들의 뒷모습은 서글프다. 윗가지를 얻기 위해 아래로 그 존재를 감추어 버리는 아랫가지의 잊혀진 존재들이며, 지는 꽃잎 속에 깨알같이 박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까만 씨앗의 눈물들이 애처롭다. 그러나 너의 연약함은 그저 연약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너의 연약함은 다시 오리라는 끊어낼 수 없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Long grove downtown,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빨간 카네이션을 한다발 안고 어머니와 함께 갔었다. 오리들이 유유히 노니는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하얀 식탁보에 보라색 들꽃들로 멋을 낸 꽃사지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부끄러운듯 소녀 같은 홍조를 띄면서도 또박또박 음식을 주문했다. 우린 Red wine을 글래스에 함께 나누며 행복한 식사를 했다. 홀로 어린 사남매를 키우며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듣고 있던 우리도 그 아픔을 나누며 함께 목이 메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어린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셨던지 노래를 자청해서 부르셨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지금까지 찬송가 외엔 들어볼 수 없던 어머니의 노래에서 유행가 가사가 그렇게 절절하고 아름답게 들려온 적은 없었다. 158㎝의 키, 50kg의 자그만 몸으로 사남매를 구김없이 키워내셨다.



그녀가 이 세상을 작별한 지도 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젠 어머니의 것들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땐 세상의 끝부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계절이 지나고 또 바뀌고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가면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그의 걸음도, 웃음도, 눈가에 맺힌 눈물도, 그녀의 노래 소리도, 수척한 손을 내저으며 이제 가라던 그녀의 쓸쓸한 마음도, 다 떠나고 이 세상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다. 지난주 Long grove downtown을 지나며 나의 눈은 그 레스토랑의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행복해하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웃음소리와, 하얀 식탁보와, 보라색 야생화가, 생생히 차창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 소리가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들려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노랗고 붉게 단풍 진 가을이 가고 눈 내리는 겨울을 지난 후 어느 봄날 우리는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지난해 뒷뜰에 피었다 지고 또 피어나던 꽃들을 생각해 낼 것이다. 어떤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찿아낼 것이다.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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