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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자녀 양육] 어머니의 인생의 의미

김종환 Dallas Baptist University 교수

가정의 달을 맞으며 문득 어머니가 그립다. 4년 반 전에 작별인사도 못드렸는데 조용히 떠나가신 어머니가 그립다. 항암치료의 고통을 안고 병상에 누워 내가 오길 애타게 기다리셨을 어머니가 그립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는 것이 좋았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하루 종일 걸어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우리집은 초가집이었는데 외갓집은 기와집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반겨주셨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뒷뜰의 아기 주먹만한 딸기가 정말 달고 부드러웠다. 조기반찬이 맛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왠 고기를 한 입에 그렇게 많이 먹냐고 조금씩 밥에 얹어 먹으라고 꾸짖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오빠 그리고 세 남동생들과 함께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 자라셨다. 어찌어찌하다가 중매로 산을 서너 개 넘어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오셨다. 가진 것이라고는 논 한 마지기도 없어서 남의 집 일해주고 끼니를 이어가던 아버지 집에서 시집살이를 하셨다. 손이 터지도록 밭을 매고 시어머니와 시누이와 시동생을 섬기셨다.

서울로 이사해서는 판자집에 살면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과일이나 두부를 파셨다. 재래시장에서 배추, 무우, 파 같은 채소를 파셨다. 살을 에는 듯 추운 날에는 두툼한 비닐을 좌판 주변에 두르고 조그만 연탄난로를 피워 놓고 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로 피로를 푸셨다. 술이 과한 날은 어머니한테 소리를 지르고 세숫대야을 둘러엎기도 하셨다. 아들들은 무뚝뚝하고 퉁명했다. 나는 책 사달라고, 학원 보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다른 친구들이 갖고 있는 것이 갖고 싶다고 심술을 부렸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모든 것들을 참고 견디며 사셨다. 나와 내 동생들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인생의 의미였다. 하루 동안 팔 물건이 들어오면 제일 좋은 것은 우리에게 먹이셨다. 좋은 옷을 자주 사주지는 못하셨지만, 털실을 구해서 스웨터를 정성껏 만들어주셨다. 새벽마다 우리 머리맡에 무릎꿇고 앉아 우리가 잘 되기만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렇게 자란 나는 대학생이 되어 나의 삶을 찾아 어머니 곁을 떠나 멀리 미국으로 왔다.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렇지만 어쩌다 전화를 드리면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고 빨리 끊으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는 내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줄 몰랐다. 집사람이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어머니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집사람은 집에 있을 때나 나들이를 할 때나 아이들을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이들 생각, 예쁜 옷을 봐도 아이들 생각이다. 심지어 자기 몸이 아플 때도 아이들이 아프지는 않을까부터 생각한다. 온통 아이들 생각 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때때로 엄마에게 팩 하고 성질을 부린다. 그런 아이들에게서 내 어릴 적 모습을 본다. 집사람은 순간적으로 속이 많이 상했을 것 같은데도 “엄마, 미안해” 한 마디에 금방 잊어버린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이 상했을까봐 걱정한다.

이이들의 행동과 집사람의 반응을 보며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한테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형편이 그런 것을 어머니의 무능력과 잘못으로 돌렸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답답하셨을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이 이따끔씩 어머니의 오금을 박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진작에 이런 깨달음이 있었더라면 그런식으로 어머니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하지 않았었을텐데.

내 아이들도 자기들이 엄마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것을 아닐까 염려스럽다. 나처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게 될까봐 겁난다.

어머니 날을 앞두고 아이들이 엄마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문자메시지를 통해 내가 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넌지시 알렸다. 아들이 아빠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물었다.

어머니에 관해 더 많이 알지 못해서 어머니한테도 죄송하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아는 만큼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어머니한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후회를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 어머니가 남겨 놓으신 간증문이 생각났다. 우선 내가 그 글에 붙인 서문의 일부를 아이들에게 보내주었다.

“2014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뜻 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수 년 전에 친필로 쓰신 간증문이었습니다. 끝 부분의 내용으로 볼 때, 최소한 5년 전에, 어쩌면 아마 10년 전 쯤에 쓰신 것 같습니다. 2013년 10월 19일, 76세의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신 것이랍니다.

어머니는 제 삶에 주어졌던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3형제와 아버지에게 있어 현모양처이셨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신앙인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제 신앙의 동기와 모델이셨을 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내가 보낸 글을 읽은 딸이 할머니의 간증문을 보여달라고 했다. 이번 가정의 달에는 어머니의 글을 아들과 딸에게 매일 조금씩 전해주며, 어머니 이야기와 내 회한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김종환 Dallas Baptist University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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