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권대근 교수 문학칼럼: 문학평론은 문학이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문학평론은 그만큼 특수하다는 얘기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 아닌가.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정답은 내면과 문장이다.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랑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을 갖추면 된다.

이 간단한 정답을 어떤 이는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모른 척한다. ‘모르는’ 분이야 그렇다 쳐도 ‘모른 척하는’ 분이 많다는 것은 좀 문제다. 나는 문학평론만큼 보수적인 ‘글쓰기제도’를 알지 못한다. 후자인 분들은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가 평론을 ‘글’이 아닌 ‘문학’으로 만든다.

위의 두 문단, 문학평론에 관한 이야기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이다. 사람들은 평론을 칼럼이나 보고서, 논문과 같은 것이라고 곧잘 착각한다. 하지만 평론은 보고서나 논문과 다른 점이 있다. 평론은 글을 다루는 글이고, 삶에 대한 삶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보고서나 논문은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고, 이는 그 작업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모든 이들이 경험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평론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까지 아우르며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궤를 같이 한다. 문학평론의 지향점은 문학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글을 통해 보는 글, 삶을 통해 보는 삶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형식상의 차이로 인해 평론이 문학의 여타 다른 갈래보다는 직접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문학평론은 매우 직접적이고 친절한 문학이기도 하다. 여타의 문학들은 지은이가 형상화한 것을 기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먼저 지은이가 형상화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지은이가 형상화한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텍스트는 완성된 그 순간부터 고정된다고 생각하지만, 텍스트는 읽는 상황과 그 텍스트를 독자가 얼마나 받아들이고 어떻게 지은이의 형상화를 따라가며 나름의 체계를 구축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는 비정형, 무정형이며 변화무쌍한 그 무엇이다.



문학평론도 이와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하다. 평론가는 나름대로 그가 받아들인 텍스트의 형(形)을 형(型)으로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구축한다. 그리고 여기서 독자는 자신이 읽은 문학과 지금 읽고 있는 평론을 병렬배치하며 상호적으로 평론이라는 텍스트를 또다시 자신의 눈으로 체계 구축을 하게 된다. 이는 하나의 단계가 더 들어가고 시작점과 방향도 다르지만 근본적인 문학의 '지은이에 의한 형상화-읽는 이에 의한 의미체계 구축'이라는 큰 틀에서 동일한 길을 걷는다. 마치 역사소설이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변증법적 산물로 기능하는 것처럼, 문학평론은 근본이 된 문학과 평론의 변증법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글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 용이하고, 글이 다루는 대상도 매우 직접적이다. 독자에게는 꽤 친절하다.

사실 현존하는 많은 평론은 문학이라는 의식보다는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을 쓰는 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집필된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10%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보자. 평론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분석을 하기 위해서, 예술을 어떠한 보편적 기준을 이용해서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만약 그 정도의 이유로 평론을 한다면 그는 평론가라기보다는 '감정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론가는 그저 기존에 있던 가치와 기준을 빌려와서 평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를 창출해내고 스스로 가치기준을 재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론은 예술이며 문학이다.

평론의 목적은 훌륭한 창작자에게는 창작을 위한 조언 그리고 독자에게는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는 해설, 더 나아가 평론가만의 독특한 철학을 제시해야 한다. 문학평론으로 규정했을 때에는 문학적인 이론으로만 전개해야 한다. 문학작품을 문학교과 참고서처럼 철저히 분석하고 해설하는 이른바 '문학작품 연구논문'처럼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면 문학평론 본연의 성격에서 멀어진다. 평론은 창작자처럼 평자만의 독특한 이론이 보여야만 할 것이다.  

프로필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수필가
88년 <동양문학> 수필로 등단 후, <경북신문> ,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과 수필 당선
대한민국 수필학 대한명인(제15-436호)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사편찬위원장
국제PEN클럽부산지역위원회 수석부회장
한국본격수필가협회 회장
한국바다문학상, 부산수필문학상 수상
2016년 대한민국을 이끄는 혁신리더 대상 수상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외 14권
헌)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