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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낡은 신발

신발장 속 다 해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여름날 아침 제비가 처마 떠나 들판 쏘다니며/벌레 물어다 새끼들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세상 바다에 나가/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었다/밑창 닳고 축 나간, 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들여다볼 적마다 뭉클해지는 저것들/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재무시인의 '폐선들'전문

낡은 구두 한 켤레가 그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느낌을 써보란다. 초등학교 1학년 손주의 숙제다. 그림 옆에 세 개의 빈 칸을 남겨 두고 각기 다른 느낌을 적으라는 것인데 아이는 1번에도 'sad', 2번에도 'sad', 3번에도 'sad'라고 적어 놓았다. 가족들이 순간 심각해졌다. 아이의 심리 상태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애 어미의 말은 아직 쓸 수 있는 단어가 'sad'밖에 없어서 그랬다고 별 걱정 말라고 한다. 다행이긴 했지만 낡은 신발은 아이의 눈에도 꽤 슬프게 보였던 건 분명하다.

신다가 벗어 놓은 밑창이 닳은 신발은 그것이 누구의 신발이든 맘을 짠하게 한다. 신발이 누비고 다녔을 삶의 현장이란 게 어떤 곳인지 알기 때문이리라. 사는 일의 고단함, 최전선에서 묵묵히 견뎌야 하는 발의 또 다른 이름이 신발이다.

현관 앞에 입을 쩍 벌리고 누워있는 신발을 보면, 더욱이 가장의 낡은 신발을 보면 왠지 외로워 보인다. 이젠 신발이 알아서 발에 맞추어진 듯 말랑말랑해 보이는 가죽 구두. 어떤 변수에도 가족의 입을 지키겠다는 내심의 각오로 말랑말랑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신발은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 안에서 늘 고독하다. 잘 닦여진 파티용 구두가 아닌 이상 신발에는 일상의 명암이 발 냄새처럼 배어있다. 뛰고 달리는 것에 복무 해야 하는 운동화도 멈출 수 없는 생의 일회성 안에서 운명적이다. 신발도 예전보다는 사는 게 덜 힘들겠지만 괄약근을 조이듯 긴장의 연속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늘 출렁이면서도, 적잖은 멀미를 하면서도 바로 서려는 안간힘으로 나갈 길을 찾던 신발도 어느 날 폐선처럼 부두에 묶여 막막한 삶을 올려다봐야 한다. 뒤축이 닳고 앞 코가 해진 구두들을 정리한다. 어떤 것은 아직 쓸 만하지만 유행이 지났고 어떤 것은 발의 반항으로 신을 수가 없기도 하다. 몇 개의 하이힐은 쓰레기통으로 간다. 이제 멋을 위해 신발을 신을 수가 없다 발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 잘 참으며 화해하던 신발과 발이 언제부턴가 조금만 불편해도 신음 소리를 낸다. 그 동안 너무 가혹하게 굴었다 싶기도 하다.

고흐는 여러 점의 신발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일을 하다가 금방 벗어놓은 것 같은 낡고 투박한 작업화들이다. 고흐의 작품세계를 함축적으로 품고 있는 가장 고흐적인 모티브라고도 하는 신발 그림.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샀다는 낡은 구두 한 켤레는 고흐의 손에 의해 '한 켤레의 신발'이라는 작품으로 영원히 살아있어 초등학교 아이들 감정의 수위를 가늠해보는 교본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의 운동화를 손으로 깨끗이 빨아 햇볕에 말리던 때가 생각난다. 그 때 그 운동화는 그냥 운동화가 아니고 이이들을 미래로 운반해주는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이었다. 지치지 말고 잘 달리기를 기원 했다. 무리 속에서 절대 낙오되지 않기를 기원 했고,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기를 기도하며 빨아 말리던 운동화. 아이들은 다 자랐다. 이제 그들의 영역에서 또 다른 신발을 신고 투혼 중이다. 위태로울 때도 있겠지만 생의 바다에서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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