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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차로] 어머니 내 어머니

첫 손녀의 첫 돌잔치 참석 차 뉴저지에 사는 딸 집에 갔다. 정말이지 '참석'이란 말이 꼭 맞다. 참석은 모임이나 회의 따위의 자리에 참여 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 애들은 아는 것도 많고 사는 방식도 우리하고 달라서 부모가 이러쿵 저러쿵 간섭할 일이 없다. 봉투에 수표를 넣어 잔치에 참석하는 하객과 다를 바 없다.

돌잔치상 차려 본 지가 아득한 옛 일이라 후지다고 뜯길까봐(?) 나름대로 시대 흐름을 파악하려 애썼다. 근데 돌잔치 플래너가 기획한 우아한 사진이 날아온다. 아름다운 꽃과 멋진 소품들로 정결하게 장식한, 딸 표현으론 '아주 특별한 돌상!'

오상고절(傲霜孤節) 심한 서릿발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절개를 지키는 국화나 덕과 학문, 인품을 새기는 군자의 올곧은 대나무, 향기와 고귀함, 충성과 절개를 찬미하는 난초와 매화가 수놓인 병풍 대신 상큼하고 발랄한 디자인의 휘장이 돌상 뒤에 드리워져 있다. 만학천봉(萬壑千峰)과 기암괴석 사이 피어오르는 안개와 만경창파(萬頃蒼波)에 한가롭게 노젓는 선옹이 그려진 열두폭 병풍을 기대하진 않았다. 빛과 흙으로 빚은 한아름의 녹양방초(綠楊芳草), 절벽 끝에 서 있어도 두려워 않고 휘휘 늘어진 낙랑장송(落落長松)의 위풍당당한 모습, 꽃과 새가 구름과 바람, 달빛을 동무 삼아 한가로이 드나드는 화조풍월(花鳥風月)의 오색영롱한 화조도(花鳥圖) 한 폭을 떠올린 건 구닥다리 할망구의 절망인가.

돌잡이도 실물을 그대로 안 쓰고 디자이너가 직접 작품(?)으로 만들었다는데 색 배합을 잘해서 연회장 소품 같은 기분이 든다. 솜씨 좋기로 소문 난 후배 섭외 해 만든, 돌상에 차릴 구절판을 챙겨 비행기에 싣고 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이제 알록달록한 색동과 올망졸망 차린 잔치상은 촌스런 구세대의 유물이다. 속이 꽉 차라고 빚은 송편, 나쁜 기운을 막는 수수팥떡,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백설기, 단단하라는 인절미는 유명 셰프가 만든 맛나고 멋진 케익에 밀린다.

그래도 나는 그립다. 조화롭고 세련된 멋스러움 보다 알록달록 손때 묻은 촌스러움이. 우아하고 풍미로운 연회장 보다 뒷 마당에서 다정한 친구와 이웃 불러다가 불고기 냄새 온 동네에 피우며 시끌벅적하던 그 시절 그 잔치가 그립다. 파티 플래너 대신 뒷마당에서 핀 꽃 꺾어 테이블에 놓고 잔디밭에 담요 깔고 친구에게 빌리고 이웃에서 십시일반 모은 걸로 돌잡이 용품을 장만했다. 흰 실타래를 못 구해 어머니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청소용 밀대에 붙은 실 잘라 실타래 만들며 둘이 낄낄 깔깔 웃었었다. 물론 의사 만들려고 청진기 놓는 그런 낯 붉히는 짓은 안 했다. 무얼 집느냐 보다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만 소망했다.

그 좋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촌스럽고, 폼 안나고, 구질구질 하고, 우아하지 못 하다고 어머니를 닥달하던 생각이 난다. 맛난 반찬 놔두고 혼자 계실 땐 찬물에 밥 말아 김치 하나 놓고 점심을 드시던 어머니! 궁상 떤다며 못돼먹게 구박해도 "너 퇴근 하면 같이 먹으려고…" 하시며 쓸쓸히 웃으시던 어머니.

애지중지 키운 손녀가 대견하게 어머니 노릇 잘 하는 걸 보면 얼마나 기뻐 하실까. 늦은 후회와 눈물, 죄책감이 못난 가슴을 도려낸다. "내게는, 너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잘난 딸이였다"라는 어머니 유언이 가슴을 때린다. 며칠 호화호식하며 할머니 노릇 한둥만둥 딸집살이 하고 돌아와 멸치국물 우려내 국수 말아 먹는다. 잘난 자식 보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장터국수가 훨씬 배 부르다.


이기희 / 윈드화랑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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