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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 중앙일보문학상 논픽션 가작:안문자

[시애틀 중앙일보] 발행 2016/09/22 미주판 13면 기사입력 2016/09/22 11:18

당선 소감 안문자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생을 풍요롭게 하는 재산은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문학과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 믿었기에 선망의 대상이었고 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아버지가 이민자로서 삶의 자세를 뜻 깊게 하기위해 꿈 있는 삶을 살아라, 부르짖었습니다. 또한 모든 이민자들이 차별 없이 받아온 기회를 감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에 미 주류사회에서 힘겹게 이어온 한 가정의 역사와 음악회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약력 : 연세대학교 졸업
한국YWCA 간사 및 실행위원 역임
기독교 어린이문화관 출판부
1986년 시애틀로 이민
2006년 수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워싱턴 주 지부 회원

스물한 번째, 꿈과 꿈이 이어지는 삶

안문자

가슴 벅찬 스물한 번째의 크리스마스콘서트가 막 끝났다. '오, 거룩한 밤! 별빛이 찬란한 밤!'의 합창은 전설이 된 피날레였다. 파이프오르간의 반주로 미국인 소녀합창단과 한인독창자들, 그리고 세 조카들과의 연주는 웅장하면서도 거룩했다. 연주는 끝났어도 여운에 취한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멈춘 듯 했으나 고요를 깨고 마치 폭발물이 터지듯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 속에 아버지의 활짝 웃는 얼굴이 어른거렸다. 2015년 12월, 제 21회가 된 안 씨네 크리스마스콘서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미국인들과 한인들이 어울린 600여 명의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내 주었고 장내엔 흥분된 열기가 가득 찼다. 형제들의 기쁨과 청중들의 감동은 하나가 되었다. 이 크리스마스콘서트는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아버지의 뜻을 기리고, 미 주류사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안 패밀리의 선물이다.

우리 육남매는 부모님을 중심으로 시애틀의 북쪽, 머킬티오라는 조용한 동네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넓은 미국에서 동부, 중부, 서부 그리고 한국으로 부모형제들이 흩어져 살며 그리워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한 곳에 모일 수 있었냐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육남매 가족, 모두 스물 네 명의 안 씨네들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지 어언 30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1973년에 이 작은 도시에 짐을 풀었다. 2002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까지 품고 살았던 인생의 꿈, 삶의 희망인 아버지의 가르침은 ‘꿈을 잃지 마라라. 삶이란 영원한 희망 속에 존재 하는 것이란다.’ 였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시애틀의 머킬티오란 동네에서 뿌리를 내리는 동안, 흩어져 살던 육남매 가족이 부모님 곁으로 한 가족, 두 가족 모여들었다. 형제들은 가난한 이민자들로 다시 시작하는 인생의 길을 걸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셋, 딸 셋 육남매다. 삶의 행복은 가정에서, 가정의 행복은 즐거운 인생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믿으며 열심히 살았다. 가족은 상처 때문에 돌아서지 않는다. 가족이 있어 감사했고,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가족,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가족은 희망이며, 평생 고마운 사랑이다.

1,4 후퇴, 평양에서.....피난길에 오르기 전 어렸던 언니와 꼬맹이 나는 다시는 올 수 없다고 생각 했을까? 신통하게도 앨범에서 가족들의 사진을 떼어 냈다.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할머니와 고모, 삼촌들의 사진들을. 그 속에 누렇게 변한 단 한 장, 일가친척이 다 모여 찍은 사진이 있다. 할머니의 회갑 날이라고 했다. 젊디젊은 엄마는 반 호장 저고리를 입고 꾀재재한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는 맨발에 제멋대로인 짧은 머리다. 단이 뜯어진 뜨개 바지를 입고 있는 그 멍-한 아기는 나다. 할머니, 큰아버지, 큰고모, 작은고모, 사촌오빠, 사촌언니들....알 수 없는 친척들도 있다. 피곤하고 지친 모습들은 하나같이 성난 얼굴처럼 웃지 않고 있다. 차렷 자세인 모습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이때는 아마 일제의 수렁에서 해방이 되기 전이었을 게다. 평양의 중화라는 한 시골 동네라 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농사꾼이었고 모두가 가난했다. 사진에는 할아버지가 없다.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할아버지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상해로 이주하였는데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난을 견디다 못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들판에서 아버지를 낳았다고 했다.
유명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형제처럼 지내던 독립운동가 안태국 선생은 할아버지의 사촌 형님이다. 할아버지는 이 두 분의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했다. 후에 안태국 큰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안창호 선생의 무릎에서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열다섯 살 때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머리가 좋았던 아버지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보통학교 훈도(선생)가 되는 자격 검정고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양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특별히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문인 친구들과 함께 ‘평양 아동문화사’라는 회사를 만들고 어린이 신문과 잡지를 출판하고 평양 방송국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임박할 무렵 공산당은 어린이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키고 모든 것을 압수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협박했다. 이미 공산화 된 평양 문교부에서 일하며 교과서 편찬을 맡으라고 강요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감옥에 가느냐? 몰래 월남을 하느냐의 기로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다녔다.
기독교 집안이었던 안 씨 가족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장로였던 큰아버지는 총살을 당했고 작은 고모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가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4후퇴 때 기적 적으로 후퇴하던 육군의 트럭을 타고 삼팔선을 넘었다. 군인 트럭에 탈 수 있었던 꿈같은 이야기는 다른 글에 있다. 서울에서 국군들과 헤어져 다시 기차 꼭대기로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에서의 피난살이는 우리 민족 누구나 겪었던 혹독한 세월이었다. 몇 년 후 서울로 이주한 아버지는 평양에서의 어린이 사업을 잊지 못 해 다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서사업을 하며 평양에서 마치지 못했던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자로, 아동 문학가로, 시인으로, 목사로 80여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아버지의 문서사업으로 어머니와 우리 육남매는 가난과 싸우는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우리 부모의 세대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온갖 어려움과 시대의 수모를 겪으며 우리들을 키웠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 시대의 한민족들과 함께 한국 전쟁과 분단의 희생자들이었다. 민족의 고난은 조상들의 고난이 되었으며 민족의 아픔은 부모들이 겪은 눈물의 역사가 되었다.
사진속의 초라한 사람들과 우리 육 남매,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들은 그분들과 무슨 관계일까? 형제들은 그렇다 치고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이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게다. 아이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한반도의 분단을, 피난시절의 가난을, 한 맺힌 조상들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 필요도, 느끼지도 않을 게다.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다민족의 삶을 이루고 있는 미국에서 아이들은 미국아이들처럼 살아왔다. 이 시대의 이별도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된 슬픔도 상관이 없다. 우리의 조상, 한민족들은 가난과 슬픔과 피맺힌 이념의 고통을 품고 새기며 70여 년을 온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다.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우리 부모는 1973년도에 미국의 서부 워싱턴 주 시애틀에 정착했고, 육남매 가족들은 유학과 이민으로 아버지의 곁으로 왔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강산이 변하고 또 변하는 동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우리 육남매도 세월을 밟으며 뒤를 따르고 있다. 천방지축이던 아이들은 다 자라 각지로 흩어져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빈 둥지가 된 우리 육남매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아이들이 꿈을 펼치고 살도록 너그럽게 품어준 미국에 감사했던,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받아, 꿈과 꿈이 이어지는 삶이 되도록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가 자랄 땐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삶이 바람직한 인생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은 미국에서 산다.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체성의 흔들림으로 외로운 학창시절을 보내기도 했을 게다. 스마트 폰으로, 전자책으로 글을 읽고 기계로 소통한다. 모든 정보를 컴퓨터에 의지하고 있는 그들은 속도의 시대에서 빠른 변화를 숨차게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세대가, 아버지의 세대가 겪은 역사에 대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하여, 한반도의 분단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이 또 하나의 분단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른들이 쓰는 한국말과 아이들이 하는 영어에 서로가 어리둥절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한 이민자들의 가족 관계는 새로운 분단이 되고 말리라.
세월과 함께 선대가 겪었던 역사와 우리 시대가 당했던 경험들이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겠지. 우리 아버지는 바로 이것을 염려하였다. 고난과 희망이 담긴 이민자들의 삶과 또한 성공은 한민족의 역사로 이어져 왔던 바탕이요, 버팀이었음을 그들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아버지는 한민족의 역사적인 사연들과 후손들의 발전이 이어져 가족의 역사로 이어지고 한국인으로서의 빛나는 이민 역사로 남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아버지가 꿈꾸어 온 이민자들의 보람과 희망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우리 육남매가 한국 사람들과의 삶이 아니라 미 주류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한 가지의 실천으로 음악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꿈꾸어 온 이민자들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존재감의 증거라고나 할까? 이 의미를 확인시키기 위해 고민하던 아버지의 꿈 중 의 한 가지 임을 이제야 깊이 알겠다.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음악 가정이라고 말한다. 물론 음악을 전공한 연주가들도 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들이란 뜻일 게다.
우리 집에 바이올린이 생긴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육대회에 참석하고 올 때, 동생과 약속했던 바이올린을 사왔다. 지금 생각하니 아주 싼 악기였다. 아, 지금도 눈에 선한 젊었던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며 우리들을 향해 환한 웃음과 함께 새까만 바이올린 케이스를 높이 흔들었다. 아버지를 부르며 깡충거렸던 가난뱅이 꼬마들의 흥분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안 씨네 가정은 음악과 뗄 수 없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가난했다. 우리들이 한창 자랄 때도 힘겹고 고달픈 생활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타고난 예술적이고 명랑한 성품과 평생 한국의 어린이를 사랑하며 교회학교와 교사들, 한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설교와 출판으로 살아온 삶답게 가족에 대한 사랑도 컸기에 우리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자랐다. 아버지의 손자, 손녀들이 자라고 있던 때도 이민 생활의 고달픔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 앞에 모였다 하면 우리는 마냥 행복했다. 아이들은 악기들을 동원해 가곡, 동요, 찬송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온 가족들의 노래와 아이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기쁨은 힘겹게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격려가 되었고 존재의 의미가 되었다. 또한 음악을 통해서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가 되었고 따듯한 위로가 되었다.

20여 년 전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녀들이 타고난 음악적 재질에 대한 감사와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새로운 세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미국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고개를 갸웃대던 아버지가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음악이로구나!’ 미국은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민자들의 아이들에게 재능을 살리며 잘 뻗어 나가도록 품어줄 뿐 아니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가족이 뿌리내린 이 지역사회에 감사의 표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동시에 미국인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전하면서, 한 편 어려운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뜻이 있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3년 안 패밀리 콘서트인 제 1회<크리스마스콘서트>가 탄생했다. 음악회는 장소로 사용한 미국교회의 교인들과 이웃들을 초청한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가족들만 출연했지만 지금은 유명 음악인들도 출연한다. 음악회는 무료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으로 의미 있는 일을 했다. 힐링더 칠드런, 911희생자 가족, 푸드 뱅크, 암협회, 홈리스, 중병 어린이 가족 돕기, 장학금 등, 해마다 한 단체에 참석자들의 정성이 보내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큰 음악회로 성장했으니 도네이션 금액도 함께 늘어났다. 힘겹게 이어 온 우리의 정성이 시애틀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성탄절 음악회'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슬프게도 아버지와 함께 누린 기쁨은 2001년 아홉 번째 음악회가 마지막이었다.
2002년 11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해에는 큰 충격으로 음악회를 개최 할 수 없었다.
2008년에는 눈이 없는 시애틀이었건만 역대 가장 큰 눈이 내려 만반의 준비로 기대되었던 음악회가 취소되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 우리는 매 해 힘겨운 고통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음악회를 이끌어왔다. 날짜를 정해놓고 밤을 설친 날이 얼마였는지, 변덕스러운 시애틀의 날씨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어쩌나, 청중들이 옮긴 장소를 잘 못 찾아오면, 외부에서 초청한 출연자가 못 오게 되면, 청중이 너무 적으면 얼마나 민망할까. 아, 길고도 짧았던 20여 년.

아름답게 기억되는 일도 많았다. 음악회가 처음 시작됐던 1993년 1회 음악회에서는 우리 가족들이 출연했다고 이미 말했다.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단 한 번, 첫 번째 음악회서다. 장소는 머킬테오의 한 작은 교회에서였는데 동네에서 한인들이 개최한 음악회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 교회의 많은 미국인 교인들과 동네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그들은 한인들의 재능에, 특별히 한 가족인 꼬마들의 연주에 기립박수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 작은 교회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없었다. 3회까지 대여해서 사용했다. 이 때 음악회에 참석했던 한 미국 할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뜨기 전 교회에다 그랜드 피아노를 헌금한 일이다. 꼭 그랜드피아노를 사야한다고 다짐하며 유언을 했다. 한인들이 개최하는 음악회를 위해서라고.
음악회를 개최하는 날은 파킹하기가 어려워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순경들이 나와서 정리를 해 준 해도 있었다. 이날은 티켓을 떼지 않았다. 동네의 집 마당에 파킹을 하도록 허락 해준 고마운 집들도 있었다.
음악회는 이 작은 교회에서 16회까지 개최했다. 음악회가 점점 커지게 되어 더 넓고 음향시설이 좋은 장소를 빌려 개최하게 되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의 작은 음악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지금도 온다.
옥에 티라고. 음악회가 거듭될수록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지만 아쉽고도 섭섭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일부의 한인이겠지만 자기네 가족을 자랑하기 위해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말을 했다. 또, 자기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지 왜 자기 아버지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느냐고. 크리스챤으로서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음악회는 잠정적으로 아버지를 기리는 뜻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20여 년 동안 음악회를 이어온 큰 뜻과 의미가 참석자들에게 잘 전달이 되었고 많은 참석자들의 사랑과 격려를 크게 받아 왔으며 지금까지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제 20회 크리스마스콘서트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육백 여 명의 청중이 자리를 메웠다. 20회를 기념할 때는 과거에 출연했던 가족들이 노래하고 연주 했다. 2015년 12월, 21회의 음악회도 20회 때와 같은 성황을 이루었다. 가족들의 친구와 지인들, 음악회를 격려하는 한인들과 더 많은 미국인들이 모여들어 음악 사랑을 나누었다. 관객들은 인종을 초월하여 모여들었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 된다.’고 말한 것은 악성 모차르트다. 백인, 흑인, 아시안 계, 한국인들, 마치 지구촌의 축소판 같은 청중들이 열광하며 기립 박수를 할 때, 한국인들이 자랑스럽다고 칭찬으로 격려를 할 때, 청중들이 한 마음이 되어 즐거운 얼굴로 함께 캐럴을 부를 때, 전설이 된 피날레, '오 거룩한 밤'의 황홀함에,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이 잊지 않고 찾아 줄 때 나이 들어가는 형제들의 가슴은 떨렸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 기쁘시죠?' 묻는 우리에게 흡족해 하는 아버지의 미소가 화답하는 듯 떠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전에 아버지의 그 숭고했던 정신과 사랑을 다시 느끼며 존경스러운 아버지의 뜻을 기리고자 다짐하곤 한다. 20여 년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께도 감사한다.
아버지는 노래와 연주와 감상이 하나가 될 때 음악은 세계의 공통어가 된다고 말했다. 온 세계의 이민자들을 품어주고 성장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 미국을 향한 감사와 그들을 통한 이민 후세들의 희망에 감사해야 한다고도 했다. 음악회를 통해서 가르쳤던 아버지의 뜻이 음악회가 거듭될수록 새롭게 다가온다.

20회에서의 메시지에서, 머킬테오 장로교회 목사인 마크 스미스 목사는 20여 년 동안 이어온 안 패밀리가 위대하다고 말했다.
21회에서는 첫 번의 음악회가 열렸던 작은 교회의 담임이었던 웬트 목사가 특별인사를 했다. 본인은 20여 년 동안 개근을 했는데, 생존에 만났던 안 목사가 그립다고 했다. 손자, 손녀들의 어릴 때의 연주부터 어른이 된 훌륭한 음악가로서의 연주까지 듣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이끌어 온 안 패밀리의 노력과 저력에 감탄한다고도 했다.
중앙일보에서는 수준 높은 음악으로 제 21회 안 씨네 크리스마스콘서트 성황이라고 기사를 써 주었고, 한국일보에서는 성탄의 의미를 전하는 큰 음악회로 최고의 수준이며 고 안성진 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베품의 의미도 담겨있다는 기사를 썼다.
시애틀의 Y영사는, 격조 있고 평화스러운 크리스마스콘서트가 청중들의 높은 평가와 호응 속에서 미국과의 문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며, 그런 안 패밀리가 자랑스럽다고, 앞으로도 미 주류사회에서 더욱 사랑받고 발전해 나가길 응원 한다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주었다.

이 지역의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에서 아낌없는 칭찬의 기사를 첫 해부터 매 해 써 주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나열해 본다.

‘크리마스의 정신을 살린 음악회’
‘뛰어난 음악성에 뜨거운 갈채’
'수준 높은 크리스마스콘서트‘
‘미 주류사회에 떨친 한인 음악성’
‘힘든 사람을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음악회’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콘서트’
‘고 안성진 목사 가족이 해마다 개최하는 사랑의 음악회’
‘미 주류사회와 함께 성탄축하’
‘베풀고 나누는 사랑 음악회’
‘미 주류사회를 향한 안 씨네 크리스마스콘서트 20년’
‘감동과 나눔의 음악회, 제 21회 크리스마스콘서트에 600여 명’
‘제 21회, 수준 높은 음악으로 크리스마스 축하’

아! 해마다 고맙다. 20여 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열심히 취재하여 기사를 써준 두 신문사의 성의를 잊지 앉는다. 이 지역의 <비콘>이라는 미국 신문에서도 매 해 음악회의 역사를 기사로 써 준다. 또한 시애틀의 코엠 TV에서도 취재를 해 한인 뉴스에 방영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형제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기도, 재정적인 어려움도 감수했다. 처음으로 도움을 받은 두 번의 감격도 있었다. 20회를 축하하며, 21회 음악회를 격려하며 도네이션 해준 시애틀 ‘아사아나 항공’과 서울의 ‘YES 24’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나누어 준 많은 참석자들께 다시 감사드린다.

음악회는 거듭되고 있지만 그 옛날, 부모님과 함께 음악이 가득했던 행복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음악회는 버거운 삶의 여정에서 흩어졌다가도 함께 모이는 우리 가족의 기쁨이요, 희망이다. 우리는 음악회가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 육남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이어진 것, 그들의 눈부신 활동, 아버지가 미 주류사회를 위하여 음악회를 개최한 것, 미약한 우리가 그 뜻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 옛날 부모님과 함께 했던 가족들, 육남매와 아버지의 손주들은 모두 스물 네 명이었지만 지금은 서른 명으로 불어났다. 안 씨네 가족이 된 새로운 가족들은 부모님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안씨네의 얼이 흘러 내려가리라 믿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아마도 미국 땅에서 영원히 삶을 일구어 갈 것이다. 그들이 미국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먼 미래가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 꿈이 바로 아버지가 평생토록 부르짖었던 이민자로서의 드림이었다.

비록 넓은 미국 땅 한 모퉁이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이지만,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감동으로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우정을 나누게 되길 바란다. '음악과 리듬은 영혼의 비밀장소로 파고든다.'고 하지 않던가. 음악이 있어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다. 우리들의 삶 속에 부여된 많은 것들 가운데 음악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축복이며 선물이다. 계속되는 이 음악회를 통해 미 주류사회와의 아름다운 관계는 영원하리라 믿고 싶다. 그러나......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형제들은 늙어간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손주들이 할아버지의 뜻을, 부모의 세대가 이어 온 사명감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은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자기들의 삶을 이어가느라 전쟁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눈물겹게 이어 온 음악회의 참 뜻을 알고 우리들처럼 이 음악회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도 나이가 들면 달라지려나? 그들에게도 전염이 되어 영원히 계속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건만. 이런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할아버지의 꿈과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의 후손들은 이미 어른들이 되어 부모들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의 각 도시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아마죤에서, 구굴에서, 대학 강단에서, 연주가로, 사회사업가로, 컴퓨터, 방송국, 보험회사 등에서 자기의 몫을 담담하고 있으니 차별 없이 기회를 준 미국에 감사할 뿐이다.
한 가족의 역사에서 미국사회로부터 받은 사랑과 배려의 삶을 어떻게 누리느냐보다 어떻게 나누는가가 할아버지가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사명이었다. 이 뜻이 대대토록 이어갈, 우리의 후손들이 이끌어 갈 인생의 숙제다. 경제적인 부유함이나 어떠한 모습과 형편을 지니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깊은 뜻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가 우리가 바라는 삶의 의미다. 이것이 아버지가 추구해 온 이민자로서의 삶의 자세였다.
우리 집 아들, 아버지의 외손자는 할아버지를 기리며 <할아버지와의 대화>라는 글을 썼는데 할아버지를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소개한다.

중략- 나는 할아버지의 저서를 읽으며 할아버지의 글과 할아버지의 생활이 일치한다는 것을 느낀다. 할아버지의 글 가운데 <이민과 교육>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할아버지는 ‘교육은 인간이 인간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신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말씀대로 대화로, 편지로, 그리고 생일이나 졸업축하 카드 등을 통해 좋은 글로 우리를 교훈해 주셨다. 그 가운데 나는 나의 사촌형에게 써주신 시 한 편을 참 좋아한다. 그 시는 할아버지의 인생관이나 교육관을 간단하면서도 아름답게 나타내준다. 할아버지는 그러한 철학을 밖에서는 에세이와 설교 말씀을 통해 강조하시고, 안에서는 나와 사촌들 앞에서 실천하셨다.
중략-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시다.

<넌 그저 사람이면 된다.>

꽃은 그저 꽃이면 되고/ 물은 그저 물이면 되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면 된다/ 느낌 있고/ 꿈 있고/ 정 있고/ 눈물 있고/ 그리고 용기 있고/ 그저 그런 것이면 된다/ 넌 그저 사람이면 된다/ 아침 햇살 저녁노을엔/ 웬지 모르게/ 가슴 부풀고/ 그윽한 산언덕 밑에선/ 괜스레 고개가 숙여지면 된다/ 넌 그저 사람이면 된다/ 성적표에 올 에에(A)가 아니고/ 무대 위에 앞자리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한 아름 꿈을 안은 최선의 가슴이면 된다/ 남 속엔 네가 있고/ 네 속엔 남이 있고/ 정의 앞엔 고추 서고/ 불의 앞엔 용맹이 있으면 된다/ 넌 그저 사람이면 된다/ 꽃은 꽃이면 되고 물은 그저 물이면 되고/ 넌 그저 사람이면 된다/
(대학에 가는 외손자 관빈에게)

이 시는 참으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한, 할아버지의 인격을 잘 나타내준다. 쥴리어드 음대에 입학하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스트레스가 많은 삶을 시작하는 사촌 형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할아버지의 의도는 잘못해도 좋다거나 성의 없이 적당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시를 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셨다. 올A는 아니라도 정의와 불의의 차이는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 사람을 사랑하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참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다. 너그럽게 보이는 시 속에 강력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들을 교육하셨다. 부드러우면서도 옳고 그른 것에 뚜렷하고, 겉보기와는 달리 단호했으며, 언제나 미소를 지으면서도 엄격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한 그 대화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중략 외손자 : 이영재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전에 통일을 바랐다. 아름다운 산천은 변함이 없는데 단절이 있다. 남쪽은 북쪽을 잃었고 북쪽은 남쪽을 잃었다. 이산가족의 솟아오르는 분노는 땅속을 파헤치고 그리움에 지친 가슴속엔 타다 지친 멍 자국이 살아 있다. ‘잠간이면 될 거요.’친척집 다녀오듯 내딛은 남쪽을 향한 발걸음들이 반세기를 넘기며 한 맺힌 이산가족이 된 우리 조상들. 북에서건, 남에서건 살아있겠거니......통일을 향한 간절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며칠간의 만남 후 앙상한 손을 흔들며 다시 만나자며 목 메이던 이산가족의 피맺힌 약속은 바람 속에 잠겼다.
어느 문인은 실향민의 아픔을 이렇게 위로했다. ‘이별은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라고. 종말처럼 보이는 이별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쉼표라 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통일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아버지는 통일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는 어디서 살든지 한 민족이요, 한 가족임을 잊지 말고 후손들에게 그 깊은 인연을 전해야 한다. ‘꿈을 잃지 마라. 삶이란 영원한 희망 속에 존재하는 것이란다.’ 아버지의 평생 부르짖음이다. 아버지는 일생토록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우리 육남매에게, 그리고 손주들에게 이 말을 가르쳤다. 이 흐름이 우리들의 후손들에게도 흘러가기를 바란다.

세월과 함께 꿈을 이루고/ 나이와 함께 뜻을 넓히고/
크고 넓고 부드럽게 살매/ 따를이 없으리 멀리 앞서매/

아버지가 우리들을 위해 써준 시다. 아버지는 이민자로서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시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신 것이다. 나는 ‘따를이 없으리 멀리 앞서매’를 읽을 적마다 그렇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럽다.
두 편의 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특별히 이민자로서의 살아 갈 방향을, 뜻을 보여 주었다. 한민족은 우리의 자존심이며 후손들의 발전은 한 민족의 핵이다.
2016년 12월, 제 22회 안 씨네 <크리스마스콘서트>도 무사히 개최되길 바란다.
이 음악회는, 음악회에 숨어 있는 뜻은 미 주류사회와의 소통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의미이며 이민자들이 미국인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한 방법이다. 고단한 이민사의 역사를 넘어 지혜와 슬기, 한 시대에 안씨네가 미국의 서북쪽 한 귀퉁이에서 수놓는 미 주류사회와 함께하는 우정의 상징이다. 이민자들의 미래에 희망을 심는 것이라 믿고 싶다. 우리 아버지, 안성진 목사의 정신과 얼이 영원히 우리 형제들과 후손들에게 함께 하리라는 걸 위안으로 간직하며 우리, 안 씨 네들의 꿈과 꿈이 이어지는 삶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

‘꿈을 잃지 마라라, 삶이란 영원한 희망 속에 존재하는 것’

‘따를이 없으리, 멀리 앞서매‘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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