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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창가]

임금님의 책 읽기

TV에 나오는 연속 사극을 보면 매일 한다는 일이 모여 앉아 남을 궁지에 빠트리는 음모를 꾸미고, 역모로 정권을 잡거나 반대세력을 역모로 몰아서 제거할 궁리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금은 밤낮으로 호의호식하며 많은 궁녀들에 둘러싸여 가무와 음주로 색에 빠져 사는 모습으로 비친다.


백성을 사랑해서 잘 살게 하려는 방책을 구하려는 노력을 어느 한 때고 볼 수가 없다.
이런 사극의 드라마틱한 사건 중심의 전개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역사를 왜곡하게 하고 실제 과거 왕실이나 양반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오류를 낳게 하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대왕에 의해 조선 문화의 새로운 기틀이 확립되고 그 융성함이 극성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 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에 와서 마지막으로 백성을 생각하고 문화를 사랑하며 성군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춘 임금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는 말을 나는 평소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다.
그래서 벽을 새로 도배하면, 그때마다 이 말을 써서 좌우명을 대신하곤 한다.


정조대왕의 어록을 편찬한 <일득록 日得錄> (남현희 편역 문자향 2008)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새로 벼슬길에 나온 근신에게 하교하였다.

“그대들은 요즘 무슨 책을 읽는가?”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게 아니다.
공무로 비록 여가가 적기는 하겠지만, 하루 한 편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과정을 세워 날마다 규칙적으로 읽는다면 일 년이면 몇 질의 경적을 읽을 수 있고, 쉬지 않고 몇 년 동안 꾸준히 읽는다면 칠서를 두루 읽을 수 있다.
지금 별도로 책 읽을 날짜를 구하려 한다면 책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다.
선비라면서 경서를 송독하여 익히지 못하면 선비다운 선비가 될 수 없다.
”」

오늘날에도 독서하면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들을 달고 산다.
‘책 읽을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얼마나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태연하게 책을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요. 독서는 정말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미루는 일이 독서이다.
정작 시간이 나면 뭘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심심하다고 불평한다.
어느 분야가 되었든 부지런히 책을 읽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책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면서도 책만큼 생활 속에서 멀어져 있는 것도 드물다.


일득록의 <독서편> 에 보면 정조대왕의 독서에 대한 열의와 탐구열이 어느 정도였는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성군의 바탕은 그의 흐트러짐 없는 일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뜻은 배움으로 인하여 확립되고, 이치는 배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독서의 공효에 기대지 않고도, “뜻이 확립되고 이치가 밝아진다.
”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과정을 정해 놓았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과정을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다.
임금이 된 뒤로도 폐기한 적이 없다.
때로는 저녁에 응접을 한 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시나마 쉬지 않고, 반드시 촛불을 켜고 책을 가져다 몇 장을 읽어서 일과를 채워야만 잠자리가 편안해진다.


불을 밝히고 밤이 늦도록 홀로 책을 읽고 있던 임금의 모습이 눈앞에 확연히 떠오른다.
용상에 앉아 신하들의 잘잘못이나 가리고 백성에게 명을 내리는 것만이 임금의 일이 아니다.
옛 성인들로부터 지혜를 구해 어떻게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평안하게 할 수 있으며 신하들이 모두 진력하여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펴나갈 것인가를 책에서 얻으려 한 모습이다.


「외물의 맛은 잠깐은 좋아할 만하지만, 오래되면 반드시 싫증이 난다.
독서하는 맛은 오래될수록 더욱 좋아,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평소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 정무를 돌보는 여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서적뿐이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평소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어, 나는 그것을 무척 괴이하게 여긴다.
세상의 아름답고 귀한 것 중에,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는 것만 한 게 어디 있으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재주와 지모가 비록 출중하더라도, 끝내는 근본이 부족하여 성취가 보잘것없게 될 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고 백성과 문화를 사랑한 조선의 마지막 성군, 정조대왕은 그의 나이 49세에 확인할 길 없는 독살설로 승하하였으니 조선민족의 수치이고 표현할 길 없는 안타까움이 여기 배어있다.
이후 조선은 바로 외척 세력의 발호와 외세의 침입으로 멸망의 내리막길을 곧바로 내려가게 되었다.


「눈 내리는 밤에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에 책을 펼칠 때, 조금이라도 나태한 생각이 일어나면 문득 달빛 아래서 입김을 불며 언 손을 녹이는 한사(寒士)와 궁유(窮儒)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뜨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기서 이 글을 읽는 이는 “아! 정조대왕이여!”하고 외마디 일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심현섭, 수필가 amt69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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