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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TALK] 디지털 혹은 아날로그?

빼어난 그림 솜씨로 벽에 그려진 소나무를 향해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전설을 기억하는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황룡사 벽화를 그린 주인공 신라의 화가 솔거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두 화가의 그림 배틀이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리자 새들이 먹기 위해 다가와 부리질을 했다. 이에 파라시오스는 "나는 사람의 눈까지 속일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며 제욱시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소문을 접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의 작업실로 찾아가 실력을 증명해보라고 말했다. 이에 파라시오스는 커튼 뒤에 보관된 자신의 그림을 확인해 보라고 가리켰고, 제욱시스가 다가가 커튼을 거두던 순간 그 자체가 그림이었음을 알고 감탄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190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현대미술의 사조인 '극사실주의'는 말 그대로 사실적 표현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럴 거면 그냥 간단하게 사진을 찍지…'라는 회의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극사실주의자들은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림을 그린다'는 역설로 대중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점점 아날로그와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진 한 방으로 간단히 끝내버리면 끝나는 것을 정교하게 그리는 나름의 철학이 있는 셈이다.

작곡가 진은숙은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등이 단골로 곡을 위촉하는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작곡가이자, 오늘날 한국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얼마 전 그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써 내려가는지를 접하게 되었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노트를 가지고 다니고, 아이디어가 정리되면 실제 악보에 일일이 옮겨가는 작업을 반복한다. 상상으로 존재하는 악상을 실제 악보로 옮기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특히 편성이 크고 많은 악기와 인원이 동원되는 곡이라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시라큐스 대학 작곡과 교수인 김택수가 지난 평창올림픽과 관련해 위촉 받은 작품의 작업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연필을 이용해 마친 스케치 초고를 바탕으로 그 다음 버전의 스케치를 진행한다. 이번에는 연필과 컬러펜을 사용한다. 이렇게 완성된 스케치는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대로 출판을 하거나 액자에 넣어 보관이 가능할 정도이다. 이런 과정을 최소 두 번, 혹은 경우에 따라서 세 번을 거치기도 한다. 아이디어를 스케치로 남긴 후 곧바로 컴퓨터에 옮기지 않고 굳이 몇 번의 스케치를 반복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실현된 상상력이 더 깊이 내면화되며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과정은 이 악보를 컴퓨터로 옮기는 일이다. 이 과정 역시 꼼꼼하지 않으면 정보들이 오기되기도 하기 때문에 확인에 확인을 거쳐야 한다.



진은숙은 아예 컴퓨터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리허설 현장에서도 그가 직접 손으로 그린 악보 뭉치를 들고 다닌다. 출판사에서 컴퓨터로 정교하게 인쇄한 출판 악보가 있는데도 말이다. 악보가 컴퓨터에서 완성되면 말끔한 악보를 볼 수 있다는 점 이외에 기입된 음들을 먼저 들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진은숙은 펜 끝에서 완성된 영감을 컴퓨터로 미리 맛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매우 우려스럽게 말했다. 쉽게 들어보며 곡을 써나간다면 작곡가의 상상력은 곧 말라버리거나, 아니면 뻔한 방향으로만 나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기계가 간단하게 가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작품은 무대에서 연주자와의 아날로그적 만남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실제 소리와 작곡가의 상상력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상상력은 작곡가의 역량이 판가름 나는 지점이다.


김동민 /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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