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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내면의 자원

정명숙 / 시인
정명숙 / 시인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9/11/02 미주판 16면 기사입력 2019/11/01 17:27

보통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데 우연히 받게 되었다. 저녁 8시, 주치의의 다급한 목소리. 나의 왼쪽 손목에 골다공증이 심하다며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요즘은 6개월에 'Prolia' 주사 한 방이면 끝이라며 나를 열심히 설득한다. 생각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2011년에 왼쪽 힙이 아팠다. 골다공증이 두려워 예방차원에서 구강 약을 먹고 난 후 6주 만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환자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헤모글로빈이 12에서 4로 떨어져 응급수혈을 4 파인트 받고 살아났었다. 골수에서 적혈구가 생성되고 비장에서 파괴되는 데 나의 경우는 장내출혈이 없었음에도 미성숙한 적혈구 수치만 엄청나게 불어나 극심한 빈혈로 쓰러졌다. 치료법은 간단했다. 일단 그 약을 중단하고 칼슘섭취와 뼈 강화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8년을 잘 견뎌왔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구글에서 Prolia를 검색해 보니 부작용이 무시무시하다. 차라리 조심하며 살지, 의사의 처방을 거절하는 말 안 듣는 환자가 될지언정 부작용으로 나의 일상생활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하필 왼쪽 손목인가 고심해 본 결과 2008년 11월에 의자에서 넘어져 골절을 입어 깁스를 했던 기억이 났지만 아주 경미해서 잊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충직한 나머지 과거의 사고를 잊고 살지만 우리 신체는 다 기억하고 저장해둔다. 놀라운 일 아닌가.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잊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해되지만 신체적인 트라우마 조차도 세포는 다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 알게 된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2011년에 투약한 그 구강 약과 그 무서운 부작용 사건이 대학 2학년 때 당한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차에 치여 공중에 떴다가 왼쪽 힙으로 주저앉았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는 가끔씩 아팠었으나 교통사고 후유증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지난 4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그 기억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기억의 창고에는 저장되어 있지 않지만 DNA 메모리에는 저장되어 있다가 나이가 드니 하나 둘씩 표출이 된다.

바쁘게 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에만 신경이 쓰인다. '온고지신'이란 사자성어를 생각해 보면 옛 것을 쌓아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인데 다시 말하면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겠다. 요즘에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 아니면 그 안쪽으로 깊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심장에 번진 무늬들을 하나씩 찾아 나서고 싶다. 슬픔을 구체적으로 만져보고 깊은 곳에서 웅성대는 기쁨을 사랑으로 건져오고 싶다. 부정적이고 불필요한 관계는 버리고 맑게 가라앉은 앙금만 꺼내고 싶다. 이 모든 마음의 탄탄한 근력이 되는 내면의 자원을 끄집어 내 한 줌의 햇볕과 한아름의 바람을 섞어 생의 찬가를 부르리라. 새 생명은 이렇게 또 피어나고 깊어진 나의 바닥을 조용히 세상에 그려보고 싶다, 그 뿐일까. 너의 내면 또 우리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감동이 숨 쉬고 있을까.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과의 어우러짐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 또한 눈부시다. 어쩌면 우리 생은 이렇듯 잠자고 있는 내면세계를 깨워 함께 노래하고 춤추도록 미리 프로그램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 생의 연출자는 바로 당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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