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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내 삶의 행복을 즐기는 중

뙤약볕 햇살로 억수비로 심술부리던 여름이 물러가고 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우리네 삶을 교란시킨 코로나바이러스도 군소리 없이 사라져 주면 얼마나 좋을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문불출한 지 반년이 넘었다. 접촉 전염을 우려해서 숙소를 아예 양로원으로 옮기고 그야말로 남편과 아이들, 친구들하고도 발길을 뚝 끊고 살았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도 내 밥벌이가 노인들을 살피는 일이니 어쩌겠나. 그렇다고 사는 일이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적 여유는 예전보다도 훨씬 많아졌다. 할머니들의 외출은 물론 그 가족들의 방문까지 금지하고, 의료 진료나 미팅도 온라인을 이용한 비대면으로 하다 보니, 하루 업무량이 거의 절반가량 줄어든 덕분이었다. 몹쓸 바이러스가 내게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정말이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없던 시간이 생기니 하루를 보내는 것이 맑은 개울물에 발 담그고 앉아 지내는 것 같다. 아침이면 뒤 숲을 바라보고 앉아 느긋하게 커피 향을 음미하는 시간도 길어졌고, 뒷전으로 밀어두었던 책은 물론,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뿐일까. 점심 후엔 숲 그림자 아래서 툭 툭 툭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는 호사도 누린다. 공짜 휴가를 즐기는 것 같아서, 문득문득 “와, 너무 행복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따금 베끼어 쓰는 시 한 편이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의 ‘불출문’이란 시다. 한글로 풀어 놓은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문밖을 안 나간 지 수십일/ 무엇으로 소일하며 누구와 벗하나/ 새장 열어 학을 보니 군자를 만난 듯/ 책 펼쳐 읽으니 옛사람을 뵙는 듯/ 제 마음 차분히 하면 수명이 늘고/ 물욕을 내지 않으면 정신도 고양되는 법/ 이렇게 하는 게 진정한 수양/ 번뇌를 없애려 애써 심신을 조율할 것도 없지.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의 정신세계가 너무 부럽다. 내 깜냥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시인의 경지겠지만, 늙어 혼자되었을 때 적적함을 자기 성찰로 승화시키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얼마 전 이 시를 다시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반년 넘게 홀로 지내면서 행복감에 젖는 걸 보면, “나도 혹시 도인이 된 거 아냐?”.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

사는 동안 지금처럼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없다. 내가 생각했던 삶이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며 사는 것이어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끔찍한 고통일 거라고 믿었다. 타인과 교류를 끊고 살아야 한다면 그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엄청난 우울감에 빠질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하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을 내 일상에 들여놓은 것만으로도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니, 참 신기했다. 인생사에서 행복만큼 주관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 누군가 내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산다고 대답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도 참 많았는데, 좀 더 노력하고 채워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어리석음 때문에, 그 행복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처음 코로나바이러스 펜데믹이 시작했을 때는 갑자기 정지된 것 같은 일상이 불편했고, 의도하지 않은 현실에 화도 났었지만, 지나다 보니 생각도 바뀌었다. 변종 바이러스 하나에도 훅 사라질 수 있는 미래에 꿈을 얹느니, 내가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며 살련다. 그런즉, 나는 지금 내 삶의 행복을 즐기는 중이다.

“진정한 행복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의존 없이 현재를 즐기는 것이며, 희망이나 두려움 중 하나로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으로,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세네카의 명언이 가슴에 쏙 들어오는 날이다.


김혜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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