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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종속과목강문계

종속과목강문계! 중학교 생물 시간에 외웠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으니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생물의 분류방식이다. 계가 가장 큰 분류인데. 동물계와 식물계로 나뉜다. 그리고 앞으로 갈수록 세부분류가 된다. 흔히 호랑이를 고양잇과라고 하는데. 고양이와 호랑이가 서로 다른 종이지만 같은 ‘과’라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물의 이름은 대개 ‘속’의 단계이다. 사람은 포유강-영장목이지만 속의 단계부터 계속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인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백인종, 흑인종, 유럽인종,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마치 사람‘종’ 안에 다른 세부 분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모든 인간은 한가지 ‘종’이다. 백인과 흑인을 나누는 유전적인 차이란 없다. DNA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런 것은 없다. 대개 흑인은 피부가 검고, 코가 크고 뭉툭하며 머리가 곱슬 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DNA를 보면 피부색이나 코의 모양, 머리카락의 종류를 결정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있지만, 이렇게 묶어서 흑인종을 규정하는 방식은 생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살아오면서 편리에 따라서 만들어 낸 여러 사회적인 구분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필자의 동료 교수 중에 한명은 ‘흑인’인데 필자보다 피부색이 더 희다.

이렇게 생물학적인 오해를 바로잡고 나면 따라오는 질문은, 이런 구분을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계층을 구분해 왔다. 왕족, 귀족이나 노예가 그중의 하나이고, 출신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동서양도 그렇고, 아직도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국가들이 있다. 구분방식은 다르지만, 이유는 같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적게 가진 자를 지배하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의 대량학살을 기억하고 있다.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면서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했다. 두 ‘인종’의 DNA가 다르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월한 아리안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황당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했지만, 스스로를 우월한 황국 시민, 당시 조선인을 열등한 백성으로 규정했다. 두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것이 합법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은 인종 간에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종’의 단계 아래에 생물학적 형질이 다른 어떤 기준으로 구분이 가능하고 또한 우열을 나눌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명백한 오류다.

SAT 성적으로 보면 흑인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적으로’ 백인 학생들에 비해서 낮다. 여기까지는 통계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흑인이 백인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가정환경이나 경제적인 차이 때문에 발생한 차이가 있다. 지난 300년의 시간 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이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수도권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이 지방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보다 평균적으로 높다. 그렇다고 수도권 학생들이 우월한 유전적 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백인 학생보다 훨씬 더 성적이 높은 흑인 학생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강자의 지배논리가 마치 진실인 줄로 착각하고 오랜 시간 동안 속아온 생각을 하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며칠 전백인 경찰에 의해서 흑인 한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의 10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건장한 체구의 40대 남성이 다른 남성의 무릎에 깔려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끔찍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지금 전국이 들끓고 있다. 혹자는 우연히 경찰이 백인이었고 또 유연히 피해자가 흑인이었다고 말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해에만 천명 넘는 시민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서 죽었다. 그중에는 백인도 많다. 하지만 인구비율을 고려하면 흑인이 백인보다 3배 넘게 더 많이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여러 가지 편견에 빠져있다. 그런 편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세심하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일상을 살면서 애써서 그런 노력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적어도 내가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다. 내가 가해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고 안심해도 괜찮은 것일까? 미국 내에서 한국인들은 소위 ‘모범적인 소수인종’으로 분류된다. 문제를 많이 일으키지도 않고,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정치적으로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모두가 좋아한다. 특히 지배계층이 좋아한다. 불평 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종업원을 싫어할 가게주인이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정말 이대로 좋은 것일까?

정의는 개인적인 면과사회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회적 정의를 주장하면서 개인의 생활은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반대로 개인적 정의만 고집하면서 사회적 정의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지금은 사회적 정의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하인혁 / 웨스턴 캐롤라이나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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