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이 아침에] 미리 맛보는 은퇴 생활

집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 내가 코로나19로 합법적인 ‘자택 대피령(stay at home)’을 명령받으니 갑갑하기는커녕 웬 떡이냐 싶었다. 졸업 후 줄곧 일을 해서 처음으로 방학을 맞이한 셈이다. 얼마만의 쉼표인가. 알차게 재충전의 시간으로 보내야지 다짐도 했지만 개학 앞두고 밀린 일기 몰아 쓰던 버릇은 여전하여 넷플릭스 시리즈 몇 편 본 것 말고 똑 부러지게 한 게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로운 일상이 지겨워 은퇴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미리 맛본다. 바쁘다며 미뤄두었던 집안정리를 매일하니 오픈하우스를 당장 해도 될 만큼 집안이 깨끗해졌다. 남편은 흙을 사와 분갈이를 하고 유튜브로 공부하며 집의 이곳저곳을 손본다.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를 소환하며 텃밭 가꾸기, 그림 그리기, 애완동물 키우기 등을 시작하는 친구들의 소식을 SNS를 통해 듣는다. 그럭저럭 순조로운 칩거생활에 길들여져 간다.

코로나19가 일상을 재편성한다. 갑자기 세끼 준비하는 것이 힘에 부쳐 남편을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의외로 손끝이 야무진 남편은 계란지단을 곱게 부치며 월남쌈을 같이 만든다. 월남쌈은 운동부족인 요즘 단골메뉴다. 썰어놓은 무가 예술이다. 30년차 부부의 맹숭맹숭한 삶에 갑자기 다정한 기류가 흐르며 닭살 부부로 거듭나려하니 놀랍다. 느긋하게 이른 저녁을 먹고 인터넷으로 유명 연주가의 연주를 듣거나 영화를 같이 본다.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운동 삼아 한국마켓에 걸어서 간다. 평소엔 냉장고 파먹기를 하다가 주말에 집에 들르는 아들 먹일 특식을 위해서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다 마주치면 ‘하이’하며 웃곤 하던 일상이 어느덧 화들짝 놀라 피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아는 분이 마켓 앞에서 줄서 있다가 전화에 정신 팔려 그대로 서있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앞으로 가라고 말했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소리치며 도끼눈으로 무섭게 째려보더라나.

국가의 위기대응 시스템을 보면 국가의 품격이 나오는데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라는 미국의 코로나 대응에 실망이 크다. 영안실 부족으로 아이스링크를 시체안치소로 이용한다는 기사는 슬프다. 부실한 의료체계와 위기를 타개할 리더십의 부재는 결국 손 씻고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집에 머물라는 지시밖에 못한다. 치료약과 백신이 나올 때까지 불안해하며 각자도생할 뿐이다.

한국 제과점에 갔다. 시간이 많아 집에서 빵 굽는 사람이 늘어 이스트와 밀가루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 소리가 들리더니 큰 매장에 종업원 한 명 없이 아주머니 홀로 텅 빈 가게를 지키고 있다. 나도 비필수 업종이라 뷰티서플라이를 닫았지만 임대료 책임이 있으니 남의 일 같지 않고 한숨이 나왔다.

동네 산책길에 어린애가 그린 포스터를 보았다.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고생하며 묵묵히 제몫을 감당하는 의료진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아이의 천진한 마음이 서투른 크레용화에 잘 나타나 감동을 준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모든 일에 유효기간이 있는지라 한없이 방학을 즐기던 나도 슬슬 답답해진다. 일하고 싶다. 열심히. 당분간 은퇴 타령은 안할 듯싶다.


최숙희 / 수필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