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삶의 뜨락에서] 단풍의 계절

박향숙 / 수필가

아침에 눈을 뜨니 7시다. 깨어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이 딸에게 가자고 한다. 갑자기 딸아이가 몹시 보고 싶었나보다. 내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7시30분, 우리 부부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차에 올라 활기차게 시동을 건다. 클리브랜드 오하이오까지 뉴저지에서 7시간, 운전할 만한 거리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도심을 빠져 나오자 드문드문 나오는 전원풍경에 단풍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의 80번 도로는 한가해서 달리기 좋은 쾌적함이 있다.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차에 오르니 방금 뽑아낸 커피 향이 차안을 꽉 채운다. 딸을 만나러 간다는 들뜸과 더불어 기분 좋은 행복감이 커피 향에 어울러 든다.

이윽고 농촌으로 접어들고 저 멀리 산과 산이 띠처럼 연결되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서쪽으로 갈수록 형형색색의 단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산굽이를 돌때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거대한 단풍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 단풍의 아름다움에 압도됐다. 한국의 단풍처럼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때로는 먼저 떨어진 단풍잎이 바람에 눈꽃처럼 내리며 앞 유리창에 휘몰아치는 장관을 보이곤 한다. 단풍을 감상하며 차를 달리다 난 문득 나의 나이를 되짚어 봤다.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왜일까… 떨어지는 단풍잎을 보며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내 삶의 가을에 서있는 나는 떨어지는 단풍과 나를 동일시했나 보다. 단풍잎이 떨어지고 난 후의 겨울이 연상됐다.

"왜 이래 인생은 60부터야"라고 말할 염치는 내겐 없다. 내게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린 모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은행에 저축한 돈을 꺼내 쓰듯이 한정된 나의 시간을 쓴다. 지난 60년은 나의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도 못하고 마구 꺼내 썼다. 그만큼 바쁘고 버겁게 살았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아깝진 않다. 그 시간도 내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자기의 일을 찾아 떠나고 노력한 만큼 노후를 준비했다. 아이들이 떠난 집에서 어느 순간 어리둥절해서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하던 것도 잠시였고, 난 지금의 시간이 참 좋다. 비록 남겨진 시간이 얼마 안 된다고 해도 두렵지는 않다. 조금 느리게 살고, 조금 천천히 하면서 지난 시간 바빠서라는 이유로 미루어 두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어서 난 지금의 시간이 정말 좋다.

난 내 인생의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을 살고 있다. 자식을 잘 길러내야 한다는 의무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책임도 없는 지금이 좋다.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았던 때보다 바쁘다는 핑계가 부끄러운 지금이 좋다. 지금껏 얼렁뚱땅 만들어 평양냉면 이라고 내놓아도 맛있다고 잘먹어주던 이들에게 잘 고아낸 소고기 국물에 쩡한 동치미 국물을 섞고, 맛난 고명을 올린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만들어 지금껏 사기 친걸 사과하고 대접 할 수 있는 지금의 한가로움이 좋다.

어느 봄날 햇살이 좋아서 훌쩍 봄놀이를 떠난다면 한가한 동네 노천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도 하고 햇살이 봄눈 녹일 듯 따뜻하면 옷깃을 세워 잠시 오수를 즐길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지금이 아름다운 내 인생 단풍의 계절이다. 나도 안다. 고운 빛깔의 단풍이 떨어지는 만추의 시간도 곧 지나고 겨울이 온다는 것을… 연두 빛 새순을 틔우던 때도, 짙푸른 잎 새 사이로 꽃을 피우고 몽글몽글한 열매를 맺으며 환희에 가슴이 벅찼던 시간도 지나 내 삶의 여유와 원숙함을 담아 피워낸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에 난 삶이라는 은행잔고를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싶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내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내게 영향을 주는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에게 남겨진 시간을 의미있게 살고 싶다. 아직은 단풍의 계절이 아닌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