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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산” K2 등정기: 워싱턴 산악인들의 K2 등정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

1978 년 9월 6일, 시애틀 출신의 14명의 원정대가 미국인 최초로 K2를 정복했다. 이 등반은 온갖 역경에 맞선 담력과 의지의 기념물이었지만 또 다른 실패가 당연한 듯 보이던 시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53년, 조지 벨(George Bell)이 K2에서 하산하며 미끄러져 죽음을 직감했을 때 그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흉악한 산을 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K2는 “흉악한 산”이라고 불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오르기 어렵고 위험하기로 유명하다.

28251피트에서 K2는 에베레스트산보다 779피트에 가깝지만 그 미세한 차이로 산의 경도, 외진 위치, 극한의 날씨와 기술적인 도전에 대한 보상이 된다. 벨이 말했듯이 이 산은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고 세계 8,000미터 이상인 14개의 봉우리 중 두 번째로 생명을 많이 앗아가는 산이다.



40년 전인 1978년 9월 6일, 시애틀 출신의 14명의 원정대가 미국인들 중 최초로 K2를 등정하며 역사상 세 번째로 등반에 성공했다. 시애틀의 짐 위크와이어(Jim Wickwire)와 루이스 레이차트(Louis Reichardt)가 처음 등반길에 올랐고 다음날 존 로스켈리(John Roskelley)와 릭 릿지웨이(Rick Ridgeway)가 뒤따랐다. 원정 대장은 전설의 짐 휘터커(Jim Whittaker)로 15년 전 미국인 중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인물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약화된 버전이고 현실은 이 등반이 온갖 역경에 맞선 담력과 의지의 기념물이었으며 또 다른 실패가 당연한듯 보이던 시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수십 년간 K2는 특히 1953년에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경이 등정하기 전까지 영국인들은 에베레스트에 집착해왔다. 미국 원정대들은 1938년, 1939년과 1953년에 극도로 가까워졌지만 1975년 4명의 등반자들과 함께 또 다른 시도에서 실패하였고 이로써 78팀이 등반에 실패하였다.

위크와이어와 레이차트가 팔짱을 끼고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함께 내디뎠을때 그들은 팀의 업적에 기뻐했지만 어떤 이들의 희생들을 딛고 그 자리에 섰는지 또한 상기했다.

미국 등반가들은 40년을 K2를 등정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다른 40년 동안 그들의 승리를 이어갔다. K2의 매력은 400명이 그 정상에 등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80명 이상이 등반 중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에베레스트와 비교했을 때 7,000이라는 숫자 이상의 상승이다.

팀원들은 다방면에서 재능이 많고 히말라야 경험뿐만 아니라 사업, 과학, 약학, 법학과 예술적인 방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목요일 Mountaineers가 시애틀에서 여는 축하행사에서 상을 수여받을 것이다.

이 팀은 1975년 원정의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휘태커에 의해 결성되었는데, 이 실수로 발티 짐꾼들과의 문제와 기상 악화로 인해 파업하며 진행이 불가능해졌다.

팀원들로는 휘태커(Whittaker, 49)로 미국 산악 등반가 중 가장 성취를 이루고 유명했던 REI경영 간부가 있고, 휘태커의 아내인 다이앤 로버츠(Dianne Roberts, 30)가 포토 저널리스트로써 여행 기록을 맡으며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위크와이어(Wickwire, 38)는 시애틀의 변호사였고 레이차트(Reichardt, 36)는 샌프란시스코 출신 신경 생리학자였다. 이 외에 10명의 대원들이 있었고 그중에 3명은 여성이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 몇몇은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휘태커는 그에 반박하였다.

나아가 세 사람은 모두 산에서 진가를 발휘하였고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도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휘태커의 오랜 친구이자 파키스탄 정부와 로비를 한 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의 도움으로, K2를 등반하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영국인 원정대의 등반이 끝나는 7월 초까지 기다려야 했고 날씨 또한 불확실했다.
원정 초기에는 모두가 낙관적이었고 쾌활했으며 날씨도 따라주었다. 베이스캠프에는 1975년 걸렸던 시간의 절반이 걸려 13.5일 만인 7월 5일에 도착했고 첫 과정인지라 순조로운 진행이 이어졌다.

그 후 한차례의 폭풍이 산을 휩쓸며 원정을 지체시켰고 사사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등반을 하는 대원을 선정하는 데도 잇따라 문제가 일어났지만 9월 초 등반을 하기로 결정되었던 같은 대원들이 선정되었다. 휘태커가 9월 10일 짐꾼들을 호출해 산에서 대피를 할 준비를 하기를 명령했기 때문에 긴장감이 흘렀다. 다시 한번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미국은 또다시 K2 등정에 실패하게 된다.

그렇지만 날씨는 유지되었고 문제는 어떤 길을 통해 정상에 오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동쪽 노선의 로스켈리와 릿지웨이, 동쪽 면 Abruzzi Ridge방면에서 테리 베치와 함께하는 레이차트와 위크와이어로 나누어져 등반하기로 결정했다.

아브루찌를 통하는 접근 방식은 K2를 등정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지만 정상 아래로 1,400피트나 탐색해야 하므로 쉽지는 않다. 산에서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곳도 바로 이 부분이다. 위험천만한 얼음 절벽으로 구성된 협곡인 그 위협적임이 사람들을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 비스터스가 “원동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월 6일 북동쪽 노선을 이용하던 로스켈리와 릿지웨이는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멈춰야 했지만 레이차트와 위크와이어는 느리고 고되지만 꾸준히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둘은 또 다른 폭풍이 원정을 지체시킬까 걱정하며 밤을 보냈다.

위크와이어와 레이차트는 13시간의 험난한 등반 후 오후 5시 20분에 미국이 고대해오던 등정을 하였고 어둠이 자리했다. 레이차트는 금빛 태양이 지는 눈부신 카라코람산맥의 장관을 바라보며 평생의 꿈이 실현됨을 느꼈다.

위크와이어는 네 명의 등반가들 중 유일하게 산소를 사용했지만 이도 한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열을 공급하는 스토브에 연료가 떨어지며 작동이 되지 않았을 때 -40도로 떨어지는 기온을 이겨내었다. 또한 밤 동안 위크와이어는 여러 번 미끄러지며 치명적인 추락 지점에 위태로울 만큼 가까이 가기도 했다. 그는 얼음도끼와 망치를 이용해 자루를 경사에 고정하며 가까스로 생존했다.

마침내 그는그날 아브루찌를 통해 K2 등정에 성공한 로스켈리와 릿지웨이를 만났다. 원정이 끝날 무렵 레이차트가 혼자 캠프에 도착하며 위키와이어에대한 최악의 상황을 우려 중이던 팀원들은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9월 17일 파키스탄 군용 헬리콥터가 네 명의 원정대원들을 운송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위크와이어는 시애틀에서 수술을 받으며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더 많은 등반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팀원들은 집에 가기까지 100마일을 더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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