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무는 시간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무런 티도 안내고, 힘들다 엄살 부리지 않고, 혼자 파도 속을 헤엄쳐 나올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늘 혼자서 그랬던 것처럼 운명은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에. 독하게 정신줄 꼭 잡으면 어떤 난관과 고통,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정신력보다, 악 다문 입술보다, 굳게 먹은 마음보다, 더 정직한 것은 영혼을 담은 육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새 주인에게 화랑 열쇠 넘겨주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 곧장 이유 없이 모질게 아팠습니다. 몸살 감기 기운도 없이 뼈마디와 살이 저려 왔습니다. 화랑 건물 두 동 처분 하느라 지난 일년 동안 고생은 했지만 한시름 돌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가슴은 부풀었는데 몸이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만남보다는 이별이, 시작보다는 끝맺음이, 태어나는 것보다 죽는 날이 더 가슴 아린 작별이 아니던가요. 25년 전 아무런 사업 계획도 없이 뭔가 내가 꼭 하고 싶은, 꿈의 그림을 채색하고 싶어 불에 타서 반쯤 그을린 건물을 헐값에 구입했습니다. 리모델링 비용 절약하려고 하청업체 대신 직접 공사 지휘하며 건물 한 구석에 간이부엌 차려 10개월 동안 인부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 했습니다. 원래부터 계산 없이 마구잡이로 덤비는 성질에다 ‘치고 나가면 끝이 보인다’는 돈키호테식 발상으로 패기만만 했는데 막상 화랑 문 열 때 쯤에는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나서 작품 구입하기도 힘들었지요. 비어있는 공간 코너는 빈 박스에 오색 찬란한 테이블 덮개를 씌워 퍼포먼스를 했지요.

그 때는 한치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실패란 단어를 몰랐고 절대 실패해서도 안됐기에 ‘성공’ 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화랑은 자리를 잡았고 미술학교 학생수가 불어나 화랑 옆 부지에 9000스퀘어 피트의 창작예술센터를 건립했습니다. 화랑 옆 빈터는 숲이 울창해서 알짜배기 땅인데도 우리 땅으로 생각해 아무도 살 생각을 안 했지요. 매일 출근하면 그 땅에 창작센터 신축 할 때까지 눈에 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무지막지한 기도는 6년 후 응답을 받았습니다.



공터에 첫 삽질은 하던 그 짜릿하고 가슴 뛰던 날은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 입니다. 동양 여성이 오픈 한 창작예술센터는 현대 미술작품 전시 및 판매와 기획, 실내장식과 디자인, 미술학교 설립으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내 청춘과 장년을 후회없이 불태운 그 장렬했던 날들은 이제 지난 날의 기억 속에 묻힙니다.

어제 새 건물 주인이 윈드화랑 간판을 내리는 걸 봤습니다. 얼마간 그 앞을 지나 가지 못하겠지요. 분신같이 아끼던 날들을 어찌 한 순간에 허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잊겠습니다. 오늘을 참아내고 내일부턴 어제를 잊겠습니다. 다시금 펼쳐 질 새로운 세상에 굳건히 서서 풀잎 같은 시간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겠습니다.

외환위기로 명퇴 당하신 후 선생님은 ‘산에서 울다’ 칼럼을 쓰셨지요. 어릴 적부터 울보인 저는 세상 속에서 웁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웁니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이 억울해서 웁니다. 허무는 것보다 다시 시작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나는 최고다. 아직도 최고다!’ 라고 하늘 향해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스스로 최면을 걸고 싶었습니다. 허무는 시간들이 아프고 두렵다 해도 견디며 살겠습니다. 터 만 있으면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으므로.

내일은 희망이란 단어로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출발이 될 것이므로.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