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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기억은 언제나 윤색된다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9/25 06:24

예전에 참 맛있게 먹은 음식이 생각나 그 식당을 다시 찾았을 때 그저 그런 맹숭한 맛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섰던 기억.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몇 년 뒤 졸업앨범을 들춰보니 시커먼 한 마리 산짐승 같아 보였던 기억. 그 식당 음식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서 맛이 변한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그 날 하필 산짐승처럼 꾸미고 왔을 리도 없다. 음식 맛과 선생님 얼굴은 원래부터 그랬다. 그런데 내 머리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추억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된다. 특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머릿속에서 유리하게 편집해 아름다운 기억으로 저장한다. 줄리언 반스 작가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사진)는 기억과 착각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환갑의 토니 앞으로 베로니카 어머니가 보낸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500 파운드(100만원가량)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긴다는 유언장이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 토니는 베로니카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40년 전, 토니와 에이드리언, 베로니카 사이의 얽힌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 토니와 베로니카는 연인이었다. 헤어진 후 베로니카는 토니의 고등학교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토니는 아무렇지 않게 둘 사이를 축복하는 편지를 보냈다. 몇 개월 뒤 에이드리언이 욕실에서 동맥을 긋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는 환갑이 된 토니가 기억조차 희미한 옛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흩어져있던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간다.

여기서부터 토니는 지금까지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과거가 사실은 머릿속의 장난질로 비틀린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 모두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왜곡한 소설이었다.

토니가 기억하기로는 나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고, 친구에게 전 여자친구를 뺏기는 억울한 피해자이며,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던 유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을 축복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던 그의 편지 내용은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바람난 남녀가 아이를 낳아 대대손손 고통을 물려받길 바란다는 끔찍한 저주가 섞여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지난 40년 동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이유로 그 저주가 그대로 실현됐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기억을 꾸며낸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 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르다. 더하면 늘어나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기억창고 안에서는 기억을 블록쌓기처럼 차곡차곡 더하지 않는다는데 함정이 있다.

작가는 책에서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진 확신’이라고 정의했다. 개인의 삶이든 역사든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고 교훈을 통해 전진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토니와 역사 선생님이 나눴던 대화가 인상 깊다. 10대인 토니는 “역사는 승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답했고, 시간이 지난 후 환갑의 토니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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