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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의 행복한 삶이 최대 관심사였다

여자전사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김메리 그리고 가족(하)
아들 해리는 2차대전 영웅
손자 서팀은 LA경관 활약

어머니가 박씨와의 강제 결혼 중에 태어난 그레이스 언니는 지금 91세다. 그레이스 언니는 여전히 건강하다. 그녀는 스톡턴에서 살고 있다. 나는 어릴때부터 스톡턴에 살고 있는 그레이스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다. 그레이스의 아이들은 나보다 두 살이 많다고 했다.

나는 델라노에서 태어나 18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그곳에는 한국인 여섯 가족이 살았다. 또 이주 농장의 일꾼으로 일했던 많은 총각들이 부근에 살았다. 우리는 한국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델라노는 농장 지역이었고 마을에는 서로 다른 인종들이 각기 따로 살고 있었다. 백인들은 철로를 기준으로 동쪽 지역에서 주로 거주했고 멕시코인들과 타인종들은 서쪽 지역에 모여 살았다. 노동자 수용소에는 수많은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가족 중 다른 인종과 결혼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남편 루디를 처음 만났다. 그는 멕시코계 미국인이었다. 학교 학생의 3분의1이 멕시칸들이었고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그리고 일부 몇 명의 일본인과 중국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남동생과 내가 그 당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내가 12학년 때 루디와 데이트를 시작했고 우리는 1960년에 결혼했다.

우리는 델라노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와 동생 한 명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남편이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족들은 나의 결혼을 축복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 모두 루디와 친해지게 되면서 비로소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두번째 딸을 낳은 후 어머니는 델라노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고 거의 35년 동안 우리와 같이 지냈다.



우리에겐 약사가 된 두 딸이 있다. 남편들도 정말 좋은 사위들이다. 큰딸 멜리사는 UCLA 재학 당시 교제했던 토드 예이츠와 결혼했다. 토드는 UCLA에서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멜리사와 토드에겐 세 명의 아이들 서맨사 에릭 토드가 있다. 그 아이들은 현재 아고라힐스에 살고 있다.

둘째 딸 멀린다는 오언 쉐아 비세일리아와 결혼했다. 그 아이들은 대학원 교리문답 시간에 참여하면서 만났다. 오언은 UCLA에서 의사 자격증을 따고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의사로 개업했다. 그 둘에게 한 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토빈이고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임종하기 전해인 1995년 캘리포니아 피스모 해변에서 가까운 블랙레이크에서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그들은 외조부모의 200여 명에 달하는 후손들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큰언니였고 살아있는 이모 삼촌들은 모두 참석했다. 그 당시 이모 도리스와 외삼촌 랠프 폴 필립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다음해 임종하기 전까지 꽤 건강하게 사셨다. 현재 줄리아 이모와 막내 삼촌 피터만 살아있다.

물론 어머니의 삶은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외삼촌 랠프 폴 프랭크 피터 필립 모두 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들인 조이 해리 아서 새미 또한 참전을 했다. 어머니의 둘째 아들 해리 서는 군인으로서 수많은 무공훈장들을 받았다. 해리는 은성훈장과 동성훈장 두 개의 퍼플하트훈장 세 개의 유럽종군휘장과 군인훈장을 받았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어머니는 가장 기뻐했다. 어머니는 결코 자신의 인생의 쓰라림을 되뇌이지 않았다. 대신 항상 좋은 것만 기억하려 했고 어머니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은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에 밝은 도시생활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작은 카트에서 프렌치 사워 도넛 빵을 팔았는데 그 생활이 좋았다. 동전 한 푼으로 빵 한 조각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고 그 빵 한 조각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두 명의 폭력적인 남편들과 사는 동안 어머니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자살을 시도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을 발휘했다. 많은 것을 참아내고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아름다운 분이셨다. 82세인 남동생 해리는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서 최고의 어머니라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1996년 12월에 돌아가셨다.

서팀의 증언이다.

내가 10 11세쯤 될 때까지 메리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7 8세 때쯤 우리 가족은 캠튼에 살았고 할머니가 요리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한국 음식을 먹었고 멕시칸 칠리 빈 토르티야와 같은 멕시코 음식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나는 그 모든 음식이 한국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11 12세쯤 그제서야 한국 음식과 멕시코 음식을 구별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매우 상냥했다. 한국어를 했고 영어는 거의 못했다.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한국 음식과 멕시코 음식의 다른 점을 설명해줬다.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멕시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 가족이 멕시코와 관련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여섯 살쯤 막내 동생 더그와 나는 델라노에 있는 메리 할머니의 집에서 여름을 보냈다. 할머니의 네 번째 남편이자 마지막 남편인 오씨는 이미 사망했을 때였다. 할머니는 50대였고 우리가 영화를 볼 수 있게 극장에 데려가곤 했다. 메리 할머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만들어 우리를 먹였다. 그리고 나서 밭에 나가 포도와 딸기 따는 일을 하루 종일 했다. 할머니는 이주 농민처럼 일을 하고 임금 받는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이발사로도 일했다.

메리 할머니는 당신의 모든 희망을 아이들에게 걸었다. 할머니는 삶의 에너지를 아이들로부터 얻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어떠한 불만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단지 아이들의 행 복한 삶을 원했고 이것이 할머니의 생애에 최대 관심사였다.

메리 할머니가 정말로 좋아했던 한 가지는 크라운 로얄 위스키였다. 할머니는 잠들기 전 조금씩 위스키를 마셨다. 내가 자라 할머니를 방문할 때마다 그 위스키를 사가지고 갔다. 할머니는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버지 해리는 할머니처럼 델라노에서 자랐고 밭에서 대부분 일을 했고 나중에 트럭을 몰며 청과물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좋은 체력을 가졌고 정신력 또한 강인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군 생활은 아버지에게 적격이었다.

아버지는 힘들기로 유명한 다르비 대령의 정예 경비대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이 부대는 북아프리카 시실리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에 참여했다. 다르비의 경비대는 시실리 군사작전에서 공훈을 세우면서 최고의 부대가 됐다. 아버지는 적어도 세 번은 지뢰 수류탄 총으로 인한 부상을 당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 또한 1970부터 71년까지 베트남전쟁에서 군 정예 경비부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경비부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체검사에서 상위 10% 안에 들어야 하고 모든 주어진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베트남에서 우리는 많은 진압 구출 작전에 투입되었다. 군복무가 끝난 1년 후에 나는 6개월 더 복무했다. 나는 부대원들과 함께 훈련소에 갔고 전쟁에서 싸우고 생존했다. 나는 여전히 당시 부대원들과 모임에서 따로 만난다. 내가 받은 동성훈장은 적군에게 포위되었던 부대를 구출하기 위한 헬리콥터 작전에 참여하면서 받은 것이었다.

제대 후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학교에 다시 다녔다. 졸업 후 1974년 에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입사해 미국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시아 기동부대에 배치됐다. 이 기동부대는 현 아시아인 범죄 담당 부서로 마약 범죄 또한 다루고 있다. 나는 그로부터 25년 후인 2000년에 수사관으로 로스앤젤레스 경찰에서 은퇴했다.

<8화 끝>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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