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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만 기억되고 363일 잊혀지는 추모

한인이민사 탐방:리들리를 가다
농장서 번 품삯 독립운동자금 보태
역사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선조
3.1운동 1주년 시가행진 함성만 남아



그들도 이 길을 바라봤을까. 중가주 리들리로 가는 버스 안. 창 너머로 보이는 대자연이 막막했다. 낯선 땅을 향하던 선조의 시선에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이 두렵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지난 25일,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한인 이민 114주년을 맞아 중가주 한인이민사 유적지 탐방 행사를 열었다. 흥사단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을 입은 앳된 고등학생부터 흰머리 가득한 노인까지 한인 100여 명이 모였다. 연령도, 차림새도 다양하지만 설렘을 담은 표정만은 한결같았다.

LA에서 리들리까지는 버스로 3시간 반이 소요됐다. 왕복이면 7시간. 옆 좌석에 앉은 한 50대 여성은 "미국에 살면서 미주독립운동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며 "이번 기회에 조금이라도 우리 역사를 알고 싶다"고 했다.



#조국을 그리며 숨져간 얼굴들

버스가 출발하자 탐방 인솔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리들리와 다뉴바에 관한 짤막한 역사를 설명했다.

중가주 지역에 한인이 도착한 것은 1905년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리들리와 다뉴바는 1920년대 대한인국민회, 대한여성구제회 등 애국단체가 활발히 활동한 지역이다. 당시 중가주는 과일 생산지로 유명해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선조들이 바다를 건너와 정착했다.

한인이 이 지역에서 활기를 띠게 된 건 김호, 김형순이 설립한 '김브라더스'가 큰 사업체로 성장하게 된 뒤부터다. 이후 김브라더스는 중가주 한인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선조 이민자는 과일농장에서 번 품삯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에 보탰다. 대부분 의식주에 필요한 돈을 제외한 전부를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설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봤다. 먹고 쓰는 데만 해도 부족한 돈을, 알알이 쪼개 나라를 위해 쓴 사람들, 역사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사람들, 머나먼 땅에서 나라를 그리다 죽어간 얼굴들이 유리창에 스쳤다.

#규모는 작아도 열망은 똑같다

3시간 여를 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한인 이민역사 기념각(196 N Reed Ave. Reedley)'이다. 서울의 독립문과 같은 모양의 독립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크기는 작았지만 건축물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동일했다. 소수의 한인 이민자는 1910~30년대에 조선에서 들끓었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미국 땅에 그대로 옮겨왔다. 규모는 작아도 같은 온도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독립문 앞에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애국지사 10인의 기념각이 늘어서 있다. 이 기념각은 2010년 11월 리들리시와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가 함께 세웠다. 리들리 시에서 제공한 650야드 부지는 초기에 선조들이 정착했던 거주지다. 지금은 대표 독립운동가 10인의 기념 비석만 세워져 있지만, 당시 중가주에는 한인이 500명가량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350여 명이 1920년 3월 1일 1주년 기념 행진'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묘지

점심 도시락을 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인 이민선조 공원 묘지(2185 S Reed Ave, Reedley). '김브라더스'는 가난한 선조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이 공원을 조성했다. 한인 이민자 무덤은 리들리 공동묘지에 145기, 다뉴바 묘지에 45기가 남아있다. 외로운 생을 살아간 선조의 마지막 흔적이다.

푸르게 펼쳐진 공원에 흥사단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버지와 공원을 여유로이 걸어다니던 중학생 단원 한 명이 문득 한 묘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빠, 이 분은 20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네요." 한참을 서서 묘비를 바라봤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 소년이 가족 품을 떠나 타국 땅에 묻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은 듯했다.

묘지를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매년 두 차례(메모리얼데이와 광복절) 재미중가주해병대전우회가 태극기 게양 및 묘지 관리 행사를 열어 이들의 공로를 기릴 뿐이다. 선조들은 이틀만 기억되고 363일간 잊혀진다. 조국을 기억하기 위해 하루 품삯 대부분을 쓴 이들에게는 가혹한 추모다.

#거사를 도모하던 그때처럼

안창호와 이승만이 자주 다녀갔다는 버지스 호텔(1726 11th St, Reedley)을 찾았다. 1920년대 중가주 지역에 한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독립운동의 거물들이 리들리를 자주 방문했다. 버지스 호텔은 이들이 리들리 한인들과 독립운동을 직접 논의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호텔 입구 왼쪽에 'In Memory of the two Korean patriots' stay at this hotel(두 애국지사가 이 호텔에 머물렀음을 기념하며)'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 버지스 호텔은 낡았지만 고풍스럽다. 안창호와 이승만의 사진이 걸린 복도, 각 방 앞에 놓여 있는 예스러운 여행 가방,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자주 보이던 소품들…. 강요된 애국은 진부하지만, 자발적 애국은 품격이 있다.

#쓸쓸히 선 기념비

마지막 여정은 '다뉴바 3.1절 1주년 기념 시가행진 기념비'였다. 이곳은 1920년 3월 1일, 중가주 한인 350여 명이 3.1 만세운동 1주기 기념행사를 열었던 장소다. 독립에 대한 열기로 가득했던 곳, 남녀노소 한마음으로 독립을 염원했던 곳.

기념비에 적힌 민초들의 함성이 기념비가 놓인 초라한 공간과 대비됐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

LA로 돌아오는 길, 외로움에 사무친 혼들이 그 길 위에 서성이고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리들리= 김지윤·김재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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