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디지털 공감] 질문은 양보다 방향성

어린시절 읽었던 과학자들의 생애를 다룬 위인전을 기억해보면 그들이 유년시절부터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예화가 가득 차있었다.

위인전은 뉴튼이 사과가 왜 떨어질까를 질문했기에 중력을 발견했고, 스티븐슨은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의 뚜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의문을 품었기에 증기기관을 발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전은 질문으로 시작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의문을 품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관찰할 수 있는 데이터로 그 가설을 증명해 가는 것이 과학의 과정이다.

그러나 위인전의 이야기들은 그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엉뚱한 질문이라도 무조건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부작용을 야기한다. 호기심을 막지 않고 발전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의 이면에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를 우연의 산물로 가볍게 여기게 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질문은 그 양보다 방향성이 더 중요하다. 우연히 생긴 엉뚱한 질문이 아니라 예리하게 제련된 질문이 좋은 연구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좋은 질문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만 한다.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가 질문의 방향성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준다. 엉뚱한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버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참으로 짧다.

기독교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질문하지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는 반지성주의의 반대 급부에는,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질문이나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질문이 가득하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 때도 율법 선생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질문을 했고,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질문도 있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을 가다듬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탐구함이 마땅하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대신에 "우리가 누구의 이웃입니까" 물어야 하고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까" 대신에 "아무 선한 것도 없는 나를 왜 구원하셨을까"라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다.


김사무엘 박사/ 데이터과학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