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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선과 악

“성품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니, 선악을 초월해야 합니다.” 불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어디서든 한번쯤은 듣거나 읽었을법한 내용이다. 불법에 따르면 선과 악은 애초부터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선과 악을 분별(나누는 것)하지 말라는 것인가? 현실 세계에서 선과 악을 초월해서 산다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다.

당나라 시절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백거이는 도림선사에게 불법의 핵심에 대해 물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 도림선사의 대답이었다. ‘모든 악을 그치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도, “불의한 사람을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으면 큰 경계를 써서 개과를 시키는 것도 자비니, 선악을 불고(不顧)하는 자비는 참 자비가 아니요 죄고를 방지하여 주는 것이 곧 활불의 자비니라.” 라고 하시며 선악은 구분해야할 개념임을 명확히 하셨다.

그럼 앞의 법문은 틀린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외부 경계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 중생들은 습관과 업력에 따라 반응하고, 부처님은 자성의 광명에 따라 반응한다. 성품이 고요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움직인즉 위와 같은 이유로 능히 선할 수도 있고 능히 악할 수도 있다. 성품과 선악과 관련해서는 성선설과 성악설 등의 주장이 있지만, 성품의 본체 자리를 그대로 체 받아서 행할 때에는 선으로 나타나야 하므로 불법의 입장에서는 계선설(繼善說)이라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모든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 나온 분별이라야 올바른 분별이 된다는 점에서 위의 법문은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선악을 초월[진공(眞空), 공적(空寂)]할 때 참다운 선악의 분별[묘유(妙有), 영지(靈知)]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공(空)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인들은 오해하기 십상이다.



불법에서 선과 악의 진리적, 수행적 의미를 살펴보자. 선을 행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상(相,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너에게 해 준 게 얼마인데, 네가 감히 나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어 놓고 관념과 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선의로 베풀었던 작은 은혜가 오히려 죄업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악은 불법에서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연쇄 살인범이나 거액의 사기범을 볼 때 부처님은 어떠한 마음이 나실까? 미운 마음보다는 그들의 무지와 앞으로 받을 죄업에 대해 가여운 마음이 앞서지 않을까? 마치 우리가 어린 아이나 정신병자의 잘못을 볼 때처럼 말이다. 불법에서 악은 어리석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불법에서 선과 악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확히 구분하고 실행해야 할 개념들이다. 선악 수행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修於善惡分別), 둘째, 선과 악을 포용하는 것(修於善惡俱空), 셋째, 선과 악을 능히 제도하는 것이다(修於能善能惡). 선악을 초월하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불고하라는 말이 아니라, 선과 악을 초월할 때 비로소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는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양은철 교무 / 원불교 LA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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