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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첫 눈

첫 눈이 왔다.

올해는 예년보다 일찍 찾아 온 첫 눈이 폭설이 되어 모두를 당황케했다. 우리 자랄 때는 벼를 벤 논에 서리가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눈이 오곤 했다. 첫 눈은 원래 잠깐 흩뿌 리다 사라지는 '겨울을 시작한다' 라는 인사쯤으로 기억되는데 올해에는 빠르고 복잡하던 도시를 한 방에 멈추게 한 복서(a boxer)가 되었다.

첫 눈이 오면, 여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국어선생님이 들려 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첫 눈 오는 날 덕수궁 정문 앞에서의 만남의 약속은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한 때는, 그 미개하기 그지없는 불확실성의 약속이나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월이 있었다.

6.25 동란으로 서울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렸고, 남자는 전장으로 떠나가며 혹시 연락이 끊기더라도 첫 눈이 오면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하자고 여자에게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다. 여자는 해마다 첫 눈이 오면 덕수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첫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여자는 또 덕수궁으로 달려 갔으나 이번에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건너편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던 여자는 가로수 곁에 목발을 짚고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 남자를 발견한다. 여자는 급히 차에서 내려 건너편으로 달려가다 그만 차에 치이고 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기절했던 여자가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남자는 전쟁 중에 심한 부상을 입고 겨우 목숨은 살아났으나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를 잃었다. 남자도 첫눈이 오면 덕수궁으로 나갔으나 불구의 몸으로 여자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 그냥 돌아서곤 했다. 그 날도 여자가 덕수궁 정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나무 뒤에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꼬옥 잡고 다시는 헤어질 수 없노라며 흐느꼈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 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안도현 시인의 '첫눈 오는날' 중에서-

그 때는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첫 눈이 내렸다. 요즘은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점차 첫 눈이 오는 시기가 늦어지는것 같다. 지금도 나는 아이마냥 눈을 기다린다. 눈에 덮힌 그 하얀 세상을 보는 것이 좋아서다. 눈이 오면 일부러 몇 정거장 전에서 내려 뽀드득 소리나는 푹신한 눈을 밟으며 집으로 걸어가곤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흐린 하늘에서 꽃잎 같은 흰 눈이 바람에 휘돌아 내렸다. 강나루 어디쯤이던가? 함박눈 내리던 그 겨울, 언 강 위에 쌓인 눈을 밟으며 강을 건너던…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하고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은 그 겨울의 추억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경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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