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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의 '사부곡'

구미 3·1운동 주역 김익시 선생의 아들 김정옥씨
뉴욕시청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서 공로패 수상

평생 한의사로 살며 힘든 사람 찾아 침술 봉사
"난 이 상 받을 자격 없어, 아버지가 받아야"


"일본군에게 고문 당할 때 맞아 팔을 못쓰게된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도, 물건을 들 수도 없었지. 가족은 지독하게 가난했고 아들인 나는 공부를 잘해도 낙제점을 받았어. 빨간 줄이 그어진 호적 때문에 툭하면 불려가 사상 조사를 받아야 했지."

구미지구 3·1운동 주모자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김익시 선생의 아들 김정옥(94)씨의 말이다. 15일 뉴욕 시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광복 72주년 기념식에서 공로패를 수상한 김씨는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아버지에게 이 공을 돌리겠다”고 말했다.

1970년 도미 후 한평생을 한의사로, 대뉴욕지구 광복회에서 오랜 회원으로 지냈고 모자이크교회 장로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반세기도 넘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18살쯤 때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우리가 왜 이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야 했는지 돌아가시기 전이나 되어서야 말해주셨던 걸로 기억해. 고문으로 망가진 몸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셨고 장남 역할도 제대로 못하셨지만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셨어. 어릴 땐 이해가 안갔지만 그런 아버지가 여전히 자랑스러워.”

대구 사범대를 나와 경남 창녕 옥야고등학교에서 아내 이상인(90)씨와 교사로 활동하며 교가를 작사·작곡하기도 했던 김씨는 미국에 온 뒤에도 아버지 김익시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당시 피신해 있던 용정(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로 독립운동 본거지가 되었던 용정촌이 있던 곳)에 여러 차례 방문해 무료 진료를 펼쳤다.

김씨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까지는 힘들게 산다는 인식이 지배하던 때였는데, 해방이 되고나서도 내 자식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 이야기를 함구했다”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봉사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장인인 이명제씨도 상해임시정부에서 통신장교로 활동했던 감리교 목사로 김구 선생의 군 자금을 두만강으로 배달했던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 후손들은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평생을 용정, 과테말라 등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을 찾아 침술로 의료 봉사를 전해온 김씨는 “내가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자격이 없다”고 연신 말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남은 여생을 더 많이 봉사하며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는 “눈 감기 전에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황주영 기자 hwang.jooyoung@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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