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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네트워크] 꼽등이를 위한 변명

지난 주말 영화 '기생충'을 두 번 잇따라 봤다. 한국 최초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후광이 컸다. 대체 얼마나 잘 빚어냈길래?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은 감독의 세심한 설정이 역시 한눈에 들어왔다. 소품 하나, 대사 하나 꼼꼼하게 계산한 '전략가 봉준호'의 면모가 도드라졌다. 희비극 쌍곡선 얘기를 풀어가는 실마리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영화 '기생충'에는 기생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기자의 눈에는 꼽등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흔히 곱등이로 알고 있지만, 표준어로는 꼽등이가 바른 표현이다. 작품 들머리, 반지하방에 사는 백수 가장 기택(송강호)은 식탁에 올라온 꼽등이를 손으로 툭 쳐낸다. 때마침 동네에 소독차가 들어오자 공짜로 집안을 소독하고 꼽등이도 없애자고 한다. 이를테면 1석2조다.

봉준호 감독은 왜 꼽등이를 영화 초반에 등장시켰을까. 바퀴벌레와 함께 사람들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곤충이 바로 꼽등이니까…. 그런데 실제 꼽등이는 무서운 곤충이 아니다. 우리가 꼽등이를 오해하고 있을 뿐, 꼽등이 입장에선 꽤나 억울한 일이다. 곤충학자 정부희 박사는 꼽등이를 환경미화원에 견주었다. 개구리든, 지렁이든 생물의 사체를 먹어 치우는 전천후 청소부라고 했다. 꼽등이가 사라진다면 세상 또한 악취 가득한 사체더미로 변할지 모른다.

꼽등이는 잡식에 야행성이다. 따듯한 곳을 좋아해 도심 아파트에 출몰하는 바퀴벌레와 달리 돌이나 낙엽 사이, 시골집이나 폐가 등 습한 곳에 숨어 산다. 영화에서처럼 어둡고 축축한 반지하방에 간혹 나타날 수 있다.



영화 '기생충'은 넓게 보면 인간과 꼽등이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로 옮겨놓은 꼴이다. 힘센 인간과 그 아래에 사는 꼽등이의 수직구조를 지구촌 곳곳의 난제인 빈부 양극화 시각에서 비춰보는 것 같다. 성공한 사업가 박 사장(이선균)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비틀비틀 취객이 '쉬'마저 일삼는 반지하방의 극명한 대조부터 그렇다. 자영업 붕괴, 일자리 감소도 슬쩍슬쩍 건드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세상이 두부 자르듯 2분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감독 자신이 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봉 감독은 잠자리눈을 지녔다. 부의 편재, 그에 따른 복잡다단한 충돌을 때론 만화경처럼, 때론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부자와 빈자의 어정쩡한 동거, 원만한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없는 사람들끼리의 다툼도 파고든다. 그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진다.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내세웠다. 그 예의의 정도에 따라 기생과 공생이 갈라진다고 말했다. 말은 쉽지만 현실에선 이뤄내기 어려운 주문이다. 사실 자연계에는 100% 기생충이 없다. 서로 무엇인가 주고받는다. 공생이 기본이다.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는 "기생충이 희망이다"고까지 말한다. 기생충을 연구하면 알레르기·당뇨병 등 각종 질병을 치료할 길이 열릴 것으로 예견했다.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는 설명도 재미있다. 분수를 아는 기생충은 항상 먹을 만큼만 먹는다고 한다. 숙주의 양분을 과하게 뺏으면 자신이 살아갈 곳마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명확한 공생의 이치, 기생충 나아가 꼽등이에 우리가 예의를 지킬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물며 사람 사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박정호 / 한국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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