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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공포의 흑사병과 우한 폐렴

마치 세상에 종말이 닥친 것만 같았다. 중세 최대 어쩌면 인류 역사상 최대라고 해도 좋을 죽음의 그림자가 유럽을 덮쳤다.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3년 사이에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웅장한 대성당이 즐비한 가운데 중세 유럽인들은 신의 은총으로 그 영화가 내내 계속되리라고 믿었다. 그 누구도 이 평화가 단 3년 만에 깨지고 9천만 인구 중 4천만이 죽어나갈지 상상이나 했을까. 1347년 흑사병은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 해 말에는 프랑스 지중해 항구인 마르세유에 도달했고, 급속히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으로 전파되어 불과 몇 주일 사이에 추기경단의 반을 쓸어갔다.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가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1349년 내내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1350년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북유럽 전역이 흑사병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347년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가 세운 킵차크한국의 몽골 기마병은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제노바의 무역기지 카파를 포위 공격했다. 이때 몽골군은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수단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흑사병으로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모포에 담아 적진을 향해 쏘았다. 수많은 시체가 성 안으로 떨어져 쌓였고 곧 성내에서는 역병(疫病)이 돌기 시작했다. 시신에서 흑사병에 감염된 쥐벼룩들은 쥐들로 옮겨갔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벼룩들을 품은 쥐들이 사람들 사이를 무차별로 헤집고 다니며 흑사병을 옮겼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이 지나갈 때마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1348년 봄, 흑사병은 유럽 남부와 제노바, 나폴리, 마르세유 등의 수많은 항구 도시들을 휩쓸었다. 흑사병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지만, 당대의 명의들조차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랐다. 공기 전염 때문인지, 음식물 때문인지, 접촉 때문인지 감염경로조차도 오리무중이었다. 아는 것은 오로지 증상뿐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뾰족한 화살촉으로 찌르는 듯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온몸이 고열로 펄펄 끓고 본격적으로 앓아누웠다. 병이 깊어지면 병자는 타는 듯한 열로 격렬한 오한 전율 상태에 빠졌다. 증상 중에서도 특히 끔찍했던 것은 환자의 피부 세포가 괴사하면서 온몸이 검게 변한다는 점이었다. 불행하게도 병자는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살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를 맡아야 했다. 발병 후 몇 시간 만에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5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은 뒤 사망했다.



사람들은 죽어나가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흑사병이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병이 생기도록 별을 배열해 놨다는 주장, 혜성이 병을 몰고 왔다는 주장, 지진에 의해 유독가스가 지상으로 뿜어져 나와 생긴 것이란 주장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흑사병은 서쪽의 영국에서부터 동쪽의 독일까지 전 유럽을 유린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자신들의 영혼이 영원토록 신의 저주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었다. 사람들은 종부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그 영혼의 죄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죽어 나가다 보니 종부성사를 못 받고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고육지책으로 흑사병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의 면죄를 인정해줬다.

1349년 여름, 흑사병이 프랑스를 휩쓸면서 파리에서만 매일 8백여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환자들을 돌봐주던 의사들과 사제들은 병이 옮아 무덤까지 따라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의사들은 피를 빼는 방혈을 환자에게 시행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감염이 더욱 확산되었다. 런던 시민들은 흑사병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성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런던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 베네치아에서는 모든 입항 선박들을 40일간 격리시켰다. 그러나 40일간의 격리조치에도 불구하고 1349년 중반, 베네치아의 인구 절반 이상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환자에게서 나는 악취가 그 감염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들은 악취를 맡지 않기 위해 괴상한 차림을 하고 다녔다. 접촉을 피하기 위해 긴 가운을 입고 장갑을 꼈으며 새 머리 모양의 마스크 안에 공기 정화를 위한 각종 약재를 채워 넣고 그 냄새를 맡았다. 흑사병의 공포는 사회의 도덕 자체를 무너뜨렸다. 병자들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 역병은 인구의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 영향으로부터 회복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노동력이 감소하자 자연히 인건비가 상승했다. 한때 부를 누리던 지주들은 파산했며, 중세 시대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봉건제도는 철저히 붕괴되었다. 흑사병은 예술 분야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쳐 죽음이 예술 작품에 널리 사용되는 주제가 되었다. 해골과 시체가 흔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죽음의 힘을 우회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은 것도 바로 이 때였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던 역병 생존자들 가운데 다수는 도덕적 구속을 완전히 벗어 버렸다. 그리하여 도덕은 충격적일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이탈리아에서 흑사병을 피해 지방으로 이주한 피렌체의 신사 숙녀들이 평소에 즐기던 오페라 등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게 되자 대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을 편집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흑사병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다. “하늘의 잔인함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씩씩한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자들이, 아침에는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밤에는 저 세상에서 조상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지. 이 비극을 생각하는 내 안에서 슬픔이 자란다. 감염된 사람들의 상태가 가련하여 차마 볼 수가 없으며, 하루에도 천여 명씩 도움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을 길에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집안에서 나오는 시신 썩는 냄새로 알 수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묻기에 교회 묘지는 턱없이 부족하여 시신들을 높이 쌓아올려 흙으로 덮어둔다.”

종교가 삶의 중심이었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중세 사람들에게는 죽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그런데 죽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성직자의 수가 부족해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황이 흑사병으로 죽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한꺼번에 사하여 주기에 이르렀다. 이 재앙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며 사람들은 가톨릭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이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교회가 흑사병으로부터 신도들을 구원하지 못함으로써 교회의 신뢰 추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교회와 봉건 영주에 대한 전통과 권위에 대한 신뢰 상실로 중세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한(武漢) 폐렴이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있다. 이 신종 바이러스의 숙주로 박쥐가 유력시되고 있다. 박쥐를 행복의 상징으로만 여기지 않고 이를 잡아먹는 중국인들의 오랜 식습관이 부른 재앙이다. 야생의 맛을 즐기다 야생의 역습을 당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은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다. 문명의 발상인 농경생활이 전염병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핵무기보다 쉽게 많은 사람을 살상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흑사병의 악몽 때문에 지금 전세계가 떨고 있다. 무섭다. 전염병이 도는데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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