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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아버지의 뼈

대전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온양을 지난다. 문이라는 동네를 지나다 보면 오른쪽으로 자동차 한대 들어갈만한 좁은 길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반 시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작은 집 한채가 보이고 그 집 뒤로 이름 모를 꽃들이 핀 야산이 길게 펼쳐지고 있다. 그곳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있고, 아버지의 뼈를 묻을 묘지가 기다리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봄. 미국에 오기 전 아버지의 묘를 가족묘지로 옮겼다. 8살에 장손으로 아버지의 묘에 첫삽을 부었고 그 후 15년이 지나 다시 아버지의 묘를 들어냈다.
얼마큼의 흙들을 제거한 후 썩은 나무토막을 치우니 흐트러진 채로 아버지의 뼈가 드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은 없었다. 인부들을 물리고 준비해 간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뼈를 닦아냈다. 인생 마지막 남는 것이 이 뼈조각 뿐인가 싶어 일순간 허무함이 스쳐갔다.

아버지의 뼈는 일부는 흙이 되었고 일부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지식과 경험과 감정은 어디로 간 것인가? 삼십 여 년 살아온 아버지의 과거는 일순간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인가? 뼈조각을 하얀 명주천에 가지런히 싼 후 준비해간 나무 상자에 넣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아버지라는 큰 이름을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오는데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적막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많지 않았다. 내가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해나 될까? 2년 길면 3년? 그것도 표정이나 행동, 말투나 걸음걸이 등 보여지는 것 뿐이다. 나는 아버지의 뼈를 만지며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셨을까? 어떤 걸음으로 일상을 대하셨을까? 나는 아버지의 내면이 궁금해졌다.



아버지와 깊은 삶의 대화를 갖지 못한 채 나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긴 이별을 했다. 국민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였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의 질문 속에서 방황했던 사춘기 시절 나를 이끌어 주었다.

가족묘지로 아버지의 묘를 옮긴지 15년 후 아버지의 뼈는 가루가 되어 시카고 Rosehill cemetary로 옮겨졌다. 그리고 27년 후 어머니의 소원대로 아버지 곁에 자신도 화장된 후 뼈가루가 되어 아버지 곁에 묻혔다. 나는 두 분의 죽음을 목격했고 오랜 시간과 환경을 뛰어 넘어 두분은 나란히 미시간 호수 가까이 잠들어있다.

아버지의 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대답으로 살아왔다. 죽음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았지만,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현재로, 오늘을 오늘로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나와 네가 공감하고 소통되어지는 행복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두려운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좌절과 고난을 치유하는 소중한 기회와 그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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