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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루스 산책] 수인선의 추억

미국, 한국 어디서나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 생활을 지배해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나간다. 올해 초 20여 년 만에 우리 부부가 모처럼 모국 방문을 계획할 때는 감도 잡지 못한 사태다. 한국 방문 취소는 덮어두고라도, 계속되는 이 두렵고 비정상적 ‘감옥 생활’을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깜깜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주위에 온통 어둡고 우울한 소식뿐인가 했더니 엊그제 한국에서 수원과 인천을 잇는 새 전철 차선이 개통된다는 뉴스에 오랜만에 소싯적 향수에 젖어본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인천과 수원 중간쯤에 있던 원곡이라는 시골에서 산 일이 있었다. 도시 개발의 물결에 휩쓸려 지금은 큰 도시가 들어서서 내가 알던 원곡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수인선 협궤 열차가 사라진 지도 25년이 지났다고 한다. 인천을 오갈 때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이던 석탄 연기 뿜고 철커덕 철커덕 협궤 위를 달리던 증기기관차의 기억이 꿈인 양 아련하다.

“수인선 협궤열차, 버스보다 좁은 2m 남짓의 폭에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승객들은 열차가 심하게 흔들릴 때 맞은편 사람과 무릎이 닿기도 했답니다. 크기가 작다 보니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 등지에선 손님이 내려서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했던 이야기도 이제는 추억거리가 되었습니다.” 소래역사관의 수인선 영상물 앞에 서면 들을 수 있는 내레이션이라고 한다. 수인선 열차 하면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세월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7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내가 11살, 초등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1·4 후퇴가 임박하자 우리 가족은 원곡으로 난을 피하기로 했다. 가족 전부가 미리 시골로 내려가고 나와 남동생만이 인천 경동에 있던 종조부(할아버지의 동생)댁에 남겨졌다. 왜 나와 네 살 먹은 동생이 뒤에 떨어졌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얼마 후 전황이 악화되어 중공군이 곧 서울에 들이닥친다고 했고 수인선 열차 운행을 곧 중단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수인역으로 나갔다. 수인역 플랫폼은 인산인해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차에 오르려는 피난민들로 붐비는 난장판이었다. 기관차에 연결된 차 모두가 석탄 수송할 때 쓰는 무개 차량이었다. 칸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들로 가득했고 차 벽을 타고 차에 오르려고 야단이었다.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한 특별열차였는지 차표 보자는 사람도 없었고 재주껏 올라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동생을 차에 밀어 올릴 수 있었으나 내가 올라탈 공간은 없었다. 동생에게 “너 형 올 때까지 여기 꼭 있어”라는 당부를 하고 나는 그 바로 뒤차로 갔다. 용케 차에 올라 빈틈을 헤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 틈에 밀리고 부딪치는 혼란 법석 속에 차에 오르고 자리를 잡자 나는 마음이 놓였다. 동생이 앞칸에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 둘 다 차에 탔으니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갑자기 누군가가 차 밖에서 “종수야, 종수야!” 하며 내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그때 중학생이었던 5촌 당숙이었다. 경동 집에 계시던 종조모께서 우리가 걱정되어 정거장에 나가 보라고 하신 것이다.

“야, 네 동생은 어디 갔어?”
“저 앞칸에 있어요.”
“야, 같이 있어야지. 빨리 내려!”

나를 데리고 앞차로 간 아저씨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으로 나는 내 동생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동생의 손을 잡았다. 기차가 언제 떠날지 몰라 아저씨는 경동 집으로 돌아간다며 나더러 절대 둘이 함께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5번째 정거장에서 반드시 내려야 한다는 말을 신신당부했다.

아저씨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역무원 제복을 입은 사람 둘이 역 사무실 쪽에서 우리 차 쪽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우리 차와 그 바로 뒤차 사이로 가서 무슨 연장을 들이대더니 철커덕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두 화차 사이의 연결고리를 푼 소리라는 것은 몰랐다. 역무원들이 돌아가자 열차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차에 탄 사람들이 손짓, 몸짓해 가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아우성을 쳐대는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열차에 속력이 붙으면서 열차 바퀴가 레일에 부딪히는 금속음과 뺨을 때리는 세찬 바람 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날 그 피난 열차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태종수 / 전 아칸소대 정치학 교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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