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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워싱턴에서 다시 만난 박원순

오래전 시민운동가 박원순을 자주 만날 때가 있었다. 그가 영국 자선단체 옥스팜에서 영감을 얻어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한 직후였다. 안 쓰는 물건을 기증하면 자원봉사자가 손질해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단체였다. 당시에도 중고 판매상이나 재활용 가게는 있었지만, 아름다운 가게는 자원 재활용과 기부, 자원봉사와 나눔을 세련되게 버무려 차별화했다.

사업 모델은 좋은데 홍보가 문제였다. 그가 신문사로 찾아와 공동 캠페인을 제안했다.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답게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콕 짚어 설득했다. 아름다운 가게가 3호점을 연 2003년부터 21호점을 개설할 때까지 2년 가까이 ‘중앙일보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가게’ 캠페인을 진행했다. 매주 1개 지면을 할애했는데, 당시 부서에서 고참도 막내도 아닌 내가 전담하게 됐다.

기획 회의와 행사 취재 때 만난 그는 아이디어맨이었다. 국내외 새로운 정보를 모으고 흡수한 뒤 응용할 줄 알았다. 자료로 가득 채운 커다란 배낭과 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두툼한 프랭클린 플래너를 분신처럼 들고 다녔다. 서재를 통째로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나 공유 오피스가 유행이지만, 당시는 ‘업무 유목민’이 흔치 않았다. 중년 남자는 더욱 낯설었다. 플래너 속 빼곡한 일정표는 사람과 시간 관리의 정석을 보는 듯했다.

그는 시민운동가 이전에 변호사로 일했고,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지난 1월 워싱턴에서다. 서울시장으로 미국 순방 중 워싱턴에 들러 특파원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2022년까지 한반도에서 군사 훈련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주춤할 때였다. 서울시장 영역을 넘어선 주제였다. 설득력도 맥락도 없었다. 대선주자 행보냐는 질문에 예의 겸손한 웃음을 지었지만, 날카로운 눈빛도 보였다. 그는 권력을 의식하는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법률가로서 모습은 그의 생 마지막에서 보게 됐다. 4년간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고소가 접수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변호사인 그는 피의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예정이다. 피해 장소로 지목된 시청사에서 장엄한 영결식이 열렸다. 목숨과 바꾼 명예는 이렇게 지켜진 걸까. 나는 그를 시민운동가로만 기억하고 싶다. 그때는 괜찮았었다.


박현영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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