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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미국이 지금 몹시 아픕니다.

요즘 매일 저녁 뉴스 시간에 미국 TV 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방영하고있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참사 사건’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항의시위들을 시청하면서 ‘미국 사회가 큰 아품을 겪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은 2020년 5월 25일 저녁 오후 8시 미니애폴리스 경찰국 경찰관들이 46세 아프리카계(African-American) 조지 플로이드를 도로상에서 검거, 강제 진압하여 목숨을 잃게한데서 비롯됐다. 이 사건에 가담한 경찰은 아시안 계(Asian-American) 투 타오(Tou Thao, 34)를 포함 모두 4명, 그 중 백인계 (majority) 경찰관 데릭 쇼빈(Derek Chauvin)이 플로이드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약 8분간 무릎으로 목을 누르는 모습이 공개됐다. 플로이드는 쇼빈에게 “숨을 쉴 수 없어요.( I can’t breathe)”라고 계속 호소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후 “엄마, 내가 숨을 쉴수가 없어요”(Mama,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는 조지 플로이드의 음성이 영상을 통해 들려 올 때 나는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다. 3명의 경찰관들은 쇼빈의 만행을 바라만 보고 이를 말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몽족 출신 소수민족 베트남계(minority) 타오도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수민족 타오는 백인 쇼빈이 다른 소수민족 프로이드에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말렸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봤다. “내가 그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구급차가 실려간 플로이드는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에 살고있는 나와 같은 소수민족(minority)은 가끔 사회 통제(social control)와 사회 정의(social justice) 사이에서 선택의 혼란을 겪을 때가 있다. 48세의 쇼빈은 백인이면서 나이도 위이고 서열도 우위면서 미국문화를 대표하는 백인에 속한다. 더구나 다른 2명의 경찰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 통제다. 그러나 무릎으로 플로리드의 목을 누루는 행위는 사회정의에 반한다. 더구나 강자쪽에 속한 백인이 약자쪽에 속한 흑인을 횡포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 이 만행을 말렸어야 사회 정의다. 그러나 타오는 사회 통제쪽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소수민족 한인들이 지난 6일 LA한인타운 월서파크 플레이스 잔디광장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 흑인들과 함께 사회 정의를 외쳤다. 500여명의 한인들은 백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여 인종차별 반대와 소수계 인권보장을 요구했다. 미국 여러 도시에서 이와 같은 사회 정의를 위한 시위가 벌어지고있다. 다수민족의 백인들이 소수민족과 함께하는 사회 정의의 부르짖음이다. 1991년 LA흑인폭동으로 방화와 약탈로 한인상인들이 큰 아픔을 안고 있는 LA한이타운 바로 그자리에서 백인 흑인 라티노 아시안등 다수 소수민족이 함께 외치는 사회 정의다.

1864년 링컨대통령의 노예배방선언은 흑인들에게 사회 정의의 물고를 터놨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흑인민권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점철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누가 뭐라고해도 한국 중국 인도등 아시아계 멕시코 남미 히스패닉 등 이 땅의 소수민족들이 지금과 같은 법적 내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이들 흑인민권운도가들의 덕분이다. 그들이 이루어 논 열매 덕분이다. 이들 흑인들의 희생을 통해 모든 소수민족이 법적인 평등의 권리를 성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흑인들과 함께 사회 정의를 위해 투 타오처럼 방관자가 아니라 LA한인타운에서 보여 준 소수민족처럼 흑인들과 한 배를 타야 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는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투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1991년 LA흑인폭동으로 인해 한인상가들이 큰 피해를 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한인들이 흑인가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웃인 흑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한것 때문은 아닌가? 유대인들이 흑인가에서 장사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이웃과의 어울림이었다. 흑인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유대인 가게 주인이 가장 먼저 찾아 위로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벌렸다. 유대인 상인들은 상점 건물에 살면서 한 동네사람이 된 것이다.

백인의 소수민족차별대우에 흑인들과 합세해서 싸웠다. 백인에게 천대받고 사는 흑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배를 탄 소수민족인 것이다.
현재 흑인인권단체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NAACP는 1906년 흑백대표 60명이 발기하여 설립됐다. 유대인 콜럼비아대학 죠엘 스핀간(Joel Spingarn)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 운동에 유대교 라바이 스테반 와이즈(Stephan Wise)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동참했다는 사실은 미주 한인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들은 사회 통제보다 사회 정의를 택한 것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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